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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디

[보쿠로] 돌싱남 보쿠토/여성잡지칼럼니스트 쿠로오_조각글




쿠로오는 어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했다. 편집부에 넘겨야 할 원고를 마무리하느라 새벽 5시까지 카페인을 몸에 들이부으며 노트북을 붙들고 씨름을 했기 때문이다. 정오 전에 일어나 편집부에게서 피드백을 받고 장을 봐야 해서 억지로 9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새하얀 이불을 온몸에 두르고 커피부터 내리러 부엌에 갔다. 원두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흐리멍덩한 시야와 머릿속이 느릿하게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의 남자 혼자 사는 아파트지만 인테리어나 소품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커피를 내리는 쿠로오의 모습은 매우 안정적이고 배경 속에 녹아든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 공간 자체가 쿠로오 테츠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그 옆에는 담배와 재떨이가 있고 재떨이 안에는 꽁초가 몇 개피 우그러져 있었다. 마감 때가 아니면 평소에 잘 피우지 않기 때문에 노트북 근처에 약하게 밴 냄새를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치우고 잤어야 했는데 원고를 첨부한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노트북을 끄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코롱을 뿌려야지. 재떨이를 제자리에 두고 향수를 진열해놓은 장식장으로 향할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띵---도옹 하고 길게 울리는 벨 소리를 들으며 쿠로오는 사고를 빠르게 전환하려 애썼다. 이 아침에? 누구지? 편집부에서인가? 그치만 연락 없었는데?


  쿠로오가 초인종의 주인공을 예측하는 짧은 사이를 참지 못 하고 그 주인공은 몇 번의 벨을 더 눌렀다. 그 기세가 가히 맹렬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연속적으로 울리는 벨 소리를 듣자 쿠로오는 더욱 혼란스러워 얼어버렸다. 그러다 이웃에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터폰 모니터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급하게 나가느라 몸에 두르고 있던 이불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외시경을 들여다 볼 정신도 없이 문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성격 급한 초인종의 주인공을 보는 순간, 몸과 사고 모두 멈춰버렸다.


  "헤이헤이헤이, 쿠로오 오랜만-!!"

  "⋯⋯."

  "나 이혼했어-! 집에서도 쫓겨났다! 여기서 살게 해줘!"


  기억 속의 모습과 별 다를 게 없지만 제 몸 만한 이민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추리닝 차람으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보쿠토 코타로였다.





*





보통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갑작스레 현관문 앞에 찾아오는 건 예쁜 여자이거나 옛 연인 아닌가? 아, 어떻게 보면 맞구나. 옛 연인.

  마치 자기 집에 찾아온 것처럼 무지막지한 가방을 끌고 들어와 현관에 대충 세워놓고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보쿠토를 보며, 쿠로오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마냥 생각했다. 갑자기 보쿠토 코타로라니. 적어도 근 1년간은 그의 이름을 떠올려 본 적도 없다. 아니다, 6개월인가? 아무튼 보쿠토 코타로는 이제 와 쿠로오 테츠로의 생활과는 너무 동떨어진 인물이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사정들을 늘어놓으며 자기 집에 들어앉겠다고 할 줄은 전혀, 상상 밖이다. 아닌 아침에 습격을 받은 쿠로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노트북, 켜놓기만 하고 메일은 체크도 못 했는데. 와중에도 못 다한 일이 떠올랐지만 도무지 노트북 앞에 가 앉을 힘은 나지 않았다.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진 쿠로오와는 달리 보쿠토는 무척 여유로웠다. 머그를 양손으로 감싸쥔 채 고개를 이리저리 빼며 쿠로오의 집 구석구석을 살피고 감탄했다. 와, 너 혼자 사는 거야 쿠로오? 집 엄청 좋잖아! 우왓, 너 담배도 피우는 거냐? 배구는 이제 안 해? 윽- 커피 너무 써! 이런 걸 대체 어떻게 마시는 거야?


  "...하나씩 말해."

  "오우! 커피가 너무 쓰다!"

  "...블랙이라서 그래."


  블랙? 아, 그러고 보니 미키쨩도 블랙을 좋아했었는데. 보쿠토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생소한 것이었지만 쿠로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혼했다는 그 여자 이름이다. 2년 전 결혼 소식을 얼핏 들었을 때 연상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쿠로오는 그것들을 그냥 목구멍으로 삼켜버렸다. 굳이 물을 필요는 없다. 보쿠토를 집에 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쿠로오의 결심을 알 리가 없는 보쿠토는 태평하게 머그를 테이블에 놓고 눈을 반짝였다.


  "음- 다음 질문은... 맞다! 너 혼자 살아?"

  "응. 보시다시피."

  "그래? 이불을 꽁꽁 감싸고 나오길래 동거인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하?"

  "아니, 동거인이랑 엣치하고 나체로 나온 걸 수도 있잖아?"


  ...뭐라는 거야. 고등학생 때였다면 보쿠토의 허튼 소리에 맞장구를 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쿠로오의 생활과 사고방식은 모두 그 때와 바뀌어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마냥 웃고 떠들고 즐겼다면 지금 쿠로오의 삶은 그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다. 배구를 그만두고 생업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다. 고교 때 전국 5대 에이스 중 한 명으로 전국구 배구부가 있는 대학에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하고, 졸업한 뒤 프로팀에 스카웃 된 보쿠토와는 다르다.


  "됐고.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거야?"

  "아카아시한테 물어보니까 가르쳐주던데?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미리 연락은 안 했어."


  아카아시는 대체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고 있으며 남의 집에 갑자기 살겠다며 쳐들어오는 게 어떻게 서프라이즈가 될 수 있는지, 쿠로오는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래, 보쿠토는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이지만 그게 밉지 않은 녀석이다. 보쿠토가 이 집에 들어온 지 1시간도 채 안 되어, 소원했던 이전의 보쿠토에 대한 감각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앗, 아직 번호 안 바뀌었지?"


  그리고 이 무신경한 점까지 여전하다.


  "아아. 그대로야."

  "다행이네! 내 것도 그대로야. 맞다, 나 욕실 좀 써도 돼? 짐은 어디다 풀면 되고?"

  "...잠깐, 난 아직 여기 살아도 좋다고 말한 적 없는데?"

  "응? 그럼 지금 말해줘. 살아도 돼?"

  "안 돼."

  "에엑- 왜!?"


  보쿠토는 진심으로 놀라는 눈치였다. 당연히 쿠로오가 허락할 줄 알았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 모습이 너무 보쿠토다워서 할 말을 잃었다. 설명하고 싶은 것은 잔뜩이었지만 보쿠토는 못 알아들을 게 뻔했다.


  거실 한 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장 메일도 확인해야 하고 장도 보러 나가야 한다. 며칠간 마감에 시달리느라 냉장고에 먹을 만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눈앞의 골칫거리는 조금 미뤄두고 싶다.


  "일단 내가 당장 할 일이 있으니까 이따가 얘기하자. 욕실은 써도 돼."

  "짐은?"

  "갈아입을 옷만 꺼내."

  "엑-..."


  쿠로오의 단호한 대답에 보쿠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제법 안쓰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 모습에 혹해서 보쿠토에게 한 발 양보했다가는 결국 제 영역의 전부를 내주게 되리란 것을 쿠로오는 경험상 잘 알고 있다. 두 번은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 그걸 다시 겪는 다는 것은, 지금은 보쿠토가 제 영역 안에 없다는 뜻이니까. 보쿠토와의 인연은 과거의 것으로 충분하다.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았다. 손에 들린 머그 안의 커피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보다 보쿠토의 급습이 훨씬 효과적이어서 커피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입 안의 씁쓸한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그제야 한 모금 들이켰다. 커피 맛이 어떤지 감식할 수 없었다.


  "지금 할 일이라는 거, 메일 확인-?"


  등 뒤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보쿠토 덕에 쿠로오는 겨우 머금은 커피를 노트북에 뿜을 뻔 했다. 대신 사래가 들려서 한참을 켈록거렸다. 어이, 괜찮아? 보쿠토가 걱정해주며 쿠로오의 등을 쳐주었지만 쿠로오는 등에 닿는 그의 손의 온도나 넓이, 무게감, 그 어느 것도 달갑지 않았다. 사래가 멎자 더이상의 접촉은 거부한다는 완곡한 의미로 등을 등받이에 완전히 밀착해 앉았다. 물론 보쿠토가 그 의미를 간파할 리는 없다.


  "하-... 일 때문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장도 봐야 하고."

  "응? 집에 먹을 거 없어?"

  "...지금은. 나갔다 올 동안 넌 씻고 쉬고 있어."

  "그럼 그냥 시켜 먹으면 되잖아?"


  너무 당연하단 듯이 묻는 보쿠토의 말에 쿠로오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 지 몰랐다. 배달음식 안 좋아하는데. 혼자였으면 절대 택하지 않을 선택지이다. 하지만 쿠로오는 거기까지 보쿠토에게 설명하는 것이 쓸데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보쿠토를 욕실 안으로 밀어넣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욕실 안에서는 금방 물 소리가 들렸다.


  쿠로오의 눈앞에는 새로 온 메일을 알리는 알람이 깜빡거리고 있었지만 시야의 초점은 어느 곳에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몰려오면서 안구가 뻑뻑해졌다. 눈을 감자 지극히 익숙했던 이 공간과 일상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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