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십쇼!"
선술집 주방장의 익숙한 목소리가 쿠로오를 맞이했다. 그를 알아본 점원도 얼른 달려와 쿠로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올 때마다 수선스레 반겨 그만두라 했지만 매번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쿠로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늘 앉던 주방 앞 자리에 가서 앉았다. 겉옷과 머플러를 벗어 의자에 가지런히 걸고 따뜻한 정종 한 병과 꽁치구이를 주문했다. 겨우 한기를 풀고 한 잔 마시려 잔에 손을 댔을 때 입구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대뜸 큰소리가 들렸다.
"어라라? 이게 웬일이야, 쿠로오 아냐?"
"...이야-, 보쿠토."
눈에 띄는 잿빛 머리를 한 남자가 친한 척을 하며 제자리인마냥 쿠로오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옆에 앉자 옆구리에 오한이 들어 쿠로오는 쥐고 있던 정종 한 잔을 꿀꺽 넘겨버렸다.
"앗, 같이 마셔야지! 말도 않고 마시기냐?!"
"니가 갑자기 들어와서 추워."
"저어, 쿠로오상. 보쿠토상과 계실 거라면 얘기 나누시게 안쪽에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드릴까요?"
언제나 가장 반갑게 반겨주는 점원이 와서 물었다. 보쿠토가 눈을 반짝였지만 쿠로오는 미소를 두르며 사양하는 손짓을 했다.
"됐어. 이녀석이랑 할 은밀한 얘기도 없고."
"엉? 그건 무슨 말이야, 쿠로오? 나랑 비밀 얘기 하기 싫다는 거야? 섭한데-."
"시끄러. 술집에서 무슨 비밀 얘기야. 노부오, 이따가 이거 한 병 더 갖다줄래?"
쿠로오의 주문을 받은 점원은 상기된 기색으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점원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쿠토는 신기하단 듯이 눈으로 좇았다. 보쿠토의 앞에는 어느새 가득 채워진 술잔이 찰랑이고 있었다.
"언제 술집 점원 마음까지 사로잡은 거냐? 아무튼 네 말이라면 껌뻑 죽게끔 만드는 네 그 희한한 능력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우리 애들은 내가 한 마디하면 츳코미 날리기 바쁜데."
"능력 같은 게 아니라니까. 너네 애들도 고생이다. 너 같은 놈 모시느라."
"어이, 그게 아니라 날 위로해줘야지!"
몇 마디 농담과 술잔이 오고 갔다. 중간에 아까 그 점원이 적절하게 데운 정종 한 병을 더 가져왔다. 온도가 적당해서 마시기 좋다는 쿠로오의 칭찬을 들은 그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본인은 능력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게 능력이 아니면 다른 무엇일 리 없다고 보쿠토는 생각했다.
겉보기엔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지만 부하들의 신임과 충성을 듬뿍 받고 있는 쿠로오의 이름은 도쿄 일대에서 유명했다. 4대 보스로 있는 코즈마보다 쿠로오를 보고 들어간 조직원 수가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쿠로오가 그들을 덥썩 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코마 조직원의 수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그 세계에서 다른 일파의 조직원들까지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했다. 반대로 그만큼 다른 조직의 견제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쿠토는 번쩍 스치는 기억에 주먹으로 다른 손바닥을 가볍게 내리쳤다.
"맞다! 너 얼마 전에 노려졌는데 신입이 구해줬다며?"
"...아."
왜 이 얘기가 안 나오나 싶었다는 표정이다. 요 며칠 네코마 조직 외의 사람을 만나면 인사처럼 듣던 말이라 귀에 딱지가 앉을 참이었다. 게다가 별로 화제로 삼고 싶지 않은 이야기이다. 쿠로오는 입에 생선 가시를 잔뜩 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틀려."
"엥?"
"노려졌는데, 구해 준 놈이 있어서, 신입으로 삼은 거야."
쿠로오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보쿠토를 위해 친절히 끊어서 말해주었다.
"구해준 놈이라기보단 날 스토킹한 놈이고."
사족까지 덧붙여줬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니 은밀히 할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쿠로오는 문득 조용한 자리가 떠올랐다. 이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스스로의 입으로 털어놓은 적은 없다. 목숨이 노려졌는데 남의 손에 의해 구해졌다는 얘기는 떠벌릴 만한 것이 아니다. 쿠로오는 보스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참모 격 자리에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보쿠토가 다른 사람에게 조리 있게 이야기를 전달할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얘기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어쩐지 쿠로오는 입을 떼는 것이 꺼려졌다. 그날을 떠올리자 미간에 주름이 얕게 패였다.
그날은 비가 떨어지는 우중충한 날이었다. 천둥번개까지 치는 어수선한 날씨에 부하를 거느리고 다니고 싶진 않아 따라오겠다는 이누오카를 떨쳐내고 혼자 다녀오마 하고 차에서 내렸었다. 볼일을 보고 지나가는 길에 관할 클럽에 잠깐 들릴 셈이었다.
"몇 번을 다닌 길이라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어. 골목에 들어서는데 앞뒤로 두 놈씩 나타나서 날 둘러싸더라고. 앞에 한 놈은 총, 나머지는 칼."
"초옹-?"
"그래. 번화가가 바로 근처였는데 총까지 들고 나온 거 보니까 본 적 없는 얼굴들이지만 작정한 놈들이구나 싶었지."
쿠로오도 품 안에 작은 권총을 지니고 있었지만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 말했듯이 번화가가 코앞이었으니까. 자칫 잘못해 사람들의 눈에 띄면 총기 소지 건으로 언론에 보도되거나 경찰에 연행되는 수가 있다. 결국 소매품에 있는 칼을 무기로 정하고 총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간격을 단번에 좁혀 제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이라도 걸어서 정체를 알아내볼까 싶었지만 입을 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뒤에 있던 놈들이 소리를 지르며 칼을 쳐들고 달려들었다.
"일단 한 번 막기는 했는데 처음 덤빈 놈이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놈이라 팔목에 전율이 올 정도였어."
"맞다, 너 힘 약했지."
"늘 얘기하지만, 안 약하거든? 그리고 네 덩치 세 배나 되는 놈이 위에서 찍어누른다고 생각해 봐. 진짜 무식했다고."
하마터면 쥐고 있던 칼을 놓칠 뻔 했다. 언제 발포할 지 모르는 총에 대한 신경도 늦출 수 없었다. 총성이 울리면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까 함부로 못 쏠 거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소음기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어디서 보낸 놈들인진 몰라도 제대로 작정하고 온 놈들이었다. 쿠로오는 혀를 차고 다시 반격 자세를 취했다. 두 번째 공격을 막을 때엔 퓻, 하는 정적도 굉음도 아닌 소리가 어깨를 스쳐지나갔다. 지나간 자리에는 벌어진 자켓, 셔츠 사이로 새빨간 피가 보였다. 아프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깊지 않은 상처였지만 아직 와이셔츠 안에 붕대를 하고 있다. 이 얘기는 보쿠토에게 굳이 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서 이 난국을 무사히 헤쳐나가기란 무리일 거라 생각했다. 이누오카가 야마모토한테 엄청 깨질 텐데.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총 가진 놈을 먼저 제압해야 하는데 당연히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칼 던지는 묘기나 부려볼까. 벽을 등지고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 오른편 귓전에서 또 퓻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어딘가 구멍이 나는 위기는 넘겼지만 벌써 두 발이나 쏘았을 정도로 막무가내인 녀석들이라 위험했다.
"총 가진 놈 경계하느라 잠깐 한 눈 팔고 있었는데, 갑자기 양쪽에서 칼 든 놈들이 동시에 덤벼든 거지."
칼을 피하느라 앞으로 뛰쳐나간다면 총알이 날아올 게 뻔했다. 판단력이 마비된 찰나였다.
"그 신입 놈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칼 든 놈들을 제압하고."
"오오."
"총 든 놈이 놀라서 얼빠진 사이에 내가 그놈을 처리하고."
"오호."
"나머지 한 명도 신입이 처리했어. 내가 총을 뺏고 놈을 기절시킨 다음 뒤돌아보는데..."
"보는데?"
"아주 확실히 처리하고 있더라고."
난데없이 등장한 은빛 머리를 한 장신의 남자는 마지막 한 명의 급소를 정확하 찔러 죽지 않을 정도의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은빛 머리의 남자가 손을 거두자마자 쿠로오는 그의 목에 칼을 갖다댔다.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당혹감에 젖었지만 이내 눈웃음으로 바뀌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님까? 이번엔 쿠로오가 당황했다. 반드시 외국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능숙한 일본어였다. 게다가 커다란 덩치에 답지 않은 웃긴 말투였다.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저 이래봬도 일본인임다. 러시아인 혼혈. 듣고 보니 그럴싸한 생김새였다.
"어쨌든 정체를 모르니까,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지."
칼은 아직 거두지 않은 채였다. 남자가 또 웃었다. 이름을 물을 거라면 좀 더 상냥하게 물어줄 수 없음까? 칼이 남자의 목에 더 바짝 다가갔다.
"그랬더니,"
아아, 알았다구여! 하이바 리에프임다, 당신-
"스토커라고."
"뭐?"
"조직에 들어오고 싶어서 며칠 동안 내 꽁무니만 쫓아다녔다고, 그러더라고."
내내 웃는 낯짝이었다. 그래봤자 비실비실 풋내가 가득 나는 웃음이었지만 쿠로오는 어딘가 꺼림칙했다. 새파란 녀석이 보통 이런 상황에서 웃던가? 스토커라는 자기 폭로가 더 수상 쩍었지만 일단 칼은 거두었다. 리에프는 공격의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진작부터 들어 내보이고 있었던 두 손바닥을 내렸다. 당신을 위해서 일하게 해주세여, 쿠로오상. 쿠로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모양새가 아주 맹랑했다. 쿠로오는 칼을 다시 소매품에 집어넣었다. 대신에 자켓 안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표현법이 틀렸어.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내뱉었다. 네코마 조직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가 맞는 표현이다. 쿠로오를 빤히 응시하던 리에프는 아까와는 묘하게 다른 웃음을 지었다. 그거나 그거나 같은 의미져.
과연 같은가. 어쨌거나 쿠로오도 보쿠토에게 설명할 때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말았다. 구차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들어오게 했어?"
"뭐..."
쿠로오의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보쿠토는 품에서 담배갑을 꺼내다가 멈칫했다.
"아차, 실내는 금연이지?"
"어엉. 웬일로 물기 전에 떠올렸냐."
"젠자앙-, 지금 엄청 당기는데. 아무튼 들어간 거지?"
"실력 확실하고, 사지 멀쩡하고, 날 따라다니기까지 했다니까, 들어오게 해줬지."
"네가 인정할 정도의 실력이면 제법인가 본데?"
리에프가 불한당들에게 낸 자상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급소만 정확히, 조금 서툰 구석이 있었지만 눈감아 줄만 했다. 얼핏봐도 180은 훨씬 넘어 보이는 덩치에 민첩성도 제법이었다. 너무 확실한 실력이어서 부차적인 설명은 그 깔끔함에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너도 언젠가 볼 날이 있을걸."
"사무실 뺑이도 안 치고 바로 실전 투입할 생각이야?"
"아, 사무실 일은 무리. 저번에 시켰더니 국어가 엉망이어서. 러시아인 혼혈인데 일본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치곤 진짜 형편 없더라고."
"켁, 혼혈이야? 눈에 확 튀겠구만."
그렇다, 리에프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진 데에는 그의 외모도 한 몫 했다. 그날 리에프가 입고 있었던 옷은 가벼운 정장이었는데 야쿠자보단 모델로 보는 게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뭐하다 나타난 건데?"
"비슷하지, 다른 놈들이랑. 불량하게 살다가, 내 얘길 어디서 들은 모양이고."
"아니, 그것 참 신기하다니까. 처음 본 놈도 너한테 충성 바치겠다고 몸을 던지다니, 대단한 재주야."
"재주 아니라니까."
둘은 두 번째 술병을 따고 잔을 부딪혔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술이 잘 넘어간다. 혀끝에 남은 알싸한 알코올을 다시며 쿠로오는 보쿠토가 말한 '충성'이란 단어를 소리 없이 굴려보았다. 충성이라. 리에프가 몸을 던진 것은 충성 때문이 아닐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충성심이 돋아나게 하는 재주 같은 건 정말이지 전무하다. 충성이란 건 복합적이고 깊이가 있는 것이다. 세월이든 뭐든 축적되어야 가능하다. 그날 처음 만난 리에프에게 그런 것 따위는 발견하지 못 했다. 쿠로오는 리에프에게서 보다 원초적인 것을 보았다. 그가 쿠로오를 구해준 것은 아마도-
"...좋아해서."
"응? 뭐라고?"
"아니, 아무 것도. 한 병 더 시킬까?"
"네 아파트에서 와인은 어때? 담배도 맘껏 피울 수 있고."
보쿠토의 오른손이 어느새 쿠로오가 앉은 의자를 꽉 붙들고 있었다. 의자에 걸려있는 쿠로오의 외투와 머플러 위에 겹쳐진 팔뚝이 단단하다. 그리고 꼭 담배연기 한 모금을 정면으로 불어주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다. 쿠로오는 웃는 얼굴로 팔꿈치를 이용해 그의 오른손을 찍었다.
"아팟!"
"엄살 부리지마. 능청 안 떨면 생각해볼게."
"와-, 너무한 거 아냐? 우리 엄청 오랜만에 만났다고-."
"열흘 전쯤에도 만났었잖아. 그리고 네 오피스텔로 가. 거기 가본 지 꽤 됐네."
보쿠토가 웬일이냐는 눈길로 쿠로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시시껄렁한 몇 마디 대화 뒤엔 자리를 옮길 것이다. 쿠로오는 보쿠토가 단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커다란 덩치를 떠올렸다. 어리광을 부리긴 하지만 얹혀사는 주제에 하루쯤 주인이 안 들어온다고 뭐라 하진 않겠지. 무엇보다 그녀석은 나를, 좋아하니까.
쿠로오는 정종의 마지막 잔을 부딪히며 술잔과 함께 머릿속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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