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바 리에프는 이번 생일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생일은 네코마 고교에 들어와 처음 맞는 생일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네코마 배구부에 입부한 이후, 3학년인 쿠로오와 농담 따먹기도 하고 가끔 부실에서 섹스하기도 하는 그런 관계가 되고 나서 처음 맞는 기념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라는 것은 최대한 안 하려고 했지만 멋대로 빨라지는 심장과 마구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다스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활동이 시작되고 나서도 쿠로오에게서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야쿠가 부실에서 생일 축포를 쏘아올리자 다른 부원들과 다를 바 없이 스쳐지나가면서 생일 축하한다는 한 마디만 건넸을 뿐이었다.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다들 함께 있는 자리니까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부활동 중에는 생일빵이라면서 다른 때보다 더 많은 리시브를 해야 했고, 쿠로오와 둘만의 시간을 위해 추가연습을 자청했다. 타케토라가 생일날 안 하던 짓 하면 불길하니까 관두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나가자 체육관에는 쿠로오와 리에프만 남게 되었다.
리에프는 상상했다. 쿠로오는 겉보기에는 무심해 보이지만 은근히 배려심이 깊으니까 분명 뭐라도 준비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리에프는 감격의 눈물을 터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로오는 떨어진 배구공을 다시 주워 리시브 100번을 외칠 뿐이었다. 여기서 리에프는 또 실망했지만 배구에는 엄격한 그니까 생일날이라도 추가연습은 거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군말 없이 리시브 100번을 채웠다.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빠른 시간 안에.
추가연습이 끝나자 쿠로오와 둘이 체육관 뒷정리를 한 뒤 부실로 향했다. 부실로 향하는 동안 쿠로오는 말이 없었다. 분명 서프라이즈가 있을 것이라고 리에프는 기대했다. 그러나 부실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쿠로오도 그랬다. 아니, 그렇다고 리에프는 생각했다. 다음 한 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여기서 할래? 아니면 모텔 갈까?"
"에, 잠깐 쿠로상-"
"왜?"
그제서야 리에프는 쿠로오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을 돌아보는 쿠로오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가득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쿠로오의 위화감의 근원을 찾으려 리에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쿠로상, 조금 이상해여."
"뭐가?"
"그, 쿠로상이⋯. 뭔가 기분 나쁜 일 있었어요?"
"아니. 없었는데?"
쿠로오는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기대감에 들떴던 리에프의 가슴은 곧 조급함과 답답함으로 인해 빠르게 뛰었다. 리에프가 할 말을 찾지 못 하자 쿠로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일 선물로 나랑 섹스 원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건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구요, 이건-"
순간 리에프는 쿠로오의 입가가 착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쿠로오의 입꼬리는 항상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특히 리에프를 놀릴 때면 한쪽 입꼬리가 좀 더 올라갔다. 리에프는 지금 쿠로오가 자신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보통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평소의 쿠로오는 눈빛으로 리에프에게 대답을 종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쿠로오의 눈은 리에프에게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뭔데?' 하고 명백하게 묻고 있었다.
"전 단지 쿠로상이랑 특별한 날을 보내고 싶었어요. 그뿐이에요."
"⋯⋯."
"물론 섹스라던가, 하면 좋겠지만 그보단 쿠로상이 제 생일을 축하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구요. 근데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건 마치- 쿠로상이랑 저 사이에 섹스 밖에 없는 것 같잖아요."
"⋯⋯."
"저, 자만일지 모르지만 조금쯤 쿠로상에게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검까?"
사실 쿠로오와 처음 섹스를 하고 난 뒤 한 번도 말로 이 관계를 정의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리에프는 막연히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거나. 분명히 전보다 허물 없어졌고 스킨십도 잦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조그만 것으로도 부정당할 수 있는 관계라고도 생각했다. 부정하는 쪽이 자신이 됐든 쿠로오가 됐든, 둘 중 한 쪽이 모른 척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될 수도 있었다. 막연히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리에프는 그것을 외면해왔다. 덮어두었던 그 두려움이 결국 지금의 쿠로오의 형상을 갖추고 눈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리에프는 쿠로오의 입술이 영원히 열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원하는 대답을 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동시에 품은 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면 입술이 열리는 순간 그대로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응."
리에프의 바람대로,
"자만이야."
이루어지지 않았다.
쿠로오는 부지런히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그동안 리에프는 제자리에서 굳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두눈이 바쁘게 쿠로오의 움직임을 뒤쫓을 뿐이었다. 가방을 메고 자신을 스쳐가는 쿠로오의 모습이 곁눈질로 들어왔다. 쿠로오는 부실을 나서기 전에 굳어버린 리에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생일,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가족이나 친구하고 제대로 보내라고, 하이바군."
"⋯⋯."
"간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부실에는 리에프 혼자 남게 되었다. 쿠로오가 떠난 지 한참이 되어서야 리에프는 겨우 부실을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
리에프의 생일이 1시간 남짓 남았다. 쿠로오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액정을 노려만 보다가 곧 꺼버렸다. 이렇게 반복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조차 없다. 리에프를 뒤로 한 후로 그에게 왜 그랬는지 자문한 횟수도 셀 수 없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쿠로오는 짓궂기는 하지만 일부러 남에게 상처를 준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리에프에게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참 못됐다는 것은 그 말들을 한 자 한 자 뱉을 때마다 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뒤늦게 웃으면서 장난 친 거라고 무마할 수도 없었다. 리에프가 바라는 말들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하지 않았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쿠로오의 안에 있던 작은 두려움이 갑자기 몸둥이를 불려 그것들을 죄다 집어 삼켜버렸다.
리에프에게 그가 특별하지 않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다. 그는 처음으로 쿠로오가 '관계'라는 단어를 고민하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쿠로오가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진지한 것은 쿠로오와 거리가 멀었다. 특히 연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랬다. 고작 18살이고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사람들을 만나본 정도지만 그 중 연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차이거나 흐지부지 됐었는데 전부 쿠로오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쿠로오는 상관 없었다. 만날 때 좋으면 그만이고 안 만나도 그만이었다. 그런 사람들 뿐이었다, 리에프 외에는.
리에프의 솔직한 성격은 쿠로오에게 신선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쿠로오는 리에프가 자신을 여타의 사람들과 달리 진지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처음에 그의 시선은 단순히 귀찮았다. 그러나 그 시선 때문에 결국 자신도 리에프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마음에 자리하면서 두려워졌다. 섹스를 하는 순간의 쾌락을 즐기는 것은 쉬운 일이었지만 그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고역이었다.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면 낯간지럽고 온몸에 뭐가 돋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리에프와의 관계 역시 관성에 맡겼다. 쾌락을 즐기고 여느 관계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리에프의 생일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예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쿠로오가 예상했던 것들은 막상 일이 닥치고 나니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리에프의 기대하는 눈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고 리에프가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결국 리에프에게 상처가 되었다.
조금 있으면 자정이 된다. 리에프의 생일이 하루 지나게 된다. 사과를 하려면 지금 하는 것이 제일 좋을 테다. 쿠로오는 다시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집에 돌아온 리에프가 생일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에프의 머릿속에는 부실을 나서기 전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던 쿠로오의 모습 만이 맴돌았다. 그 때 그는 방금 전과는 다르게 한 쪽 입꼬리를 애써 올리고 있었다. 그건 쿠로오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증거다. 그의 포커페이스는 또래들 중에서 훌륭한 편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봤자 고교생일 뿐이었다. 진짜 감정은 굳은 표정 사이로 흘러나왔고 그건 눈치가 나쁜 리에프도 눈치 챌 만한 것이었다.
아직 시계는 12시를 넘기지 않았다. 리에프는 혹시 모를 쿠로오의 연락을 기다렸다.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가서 대체 왜 그런 거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쿠로오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잘못한 것은 분명 쿠로오인데 초조해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쪽은 자신이라니, 리에프는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이전부터 막연하게 느껴왔던, 쿠로오가 치고 있는 벽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리에프는 그 벽을 허물지 못 했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런 기분은 정말이지, 질색이다. 특히 생일날에라면 더욱.
깜빡거리던 전자시계의 날짜가 바뀌었다. 결국 쿠로오에게서 제대로 된 축하는 받지 못 했지만 뒤늦게라도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리에프는 그런 마음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침대에 누웠다. 눈꺼풀은 잠이 아닌 피로감으로 무거웠다. 그러나 분명 오늘밤은 잠에 들지 못 하겠지.
201n년 10월 30일은 하이바 리에프 생애 최악의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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