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화장품 로드샵 매장에 발을 디뎠다. 주말 아침부터 누나의 심부름 때문에 화장품 로드샵에 홀로 들어와야 하다니, 아직 잠자리에서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볼을 꼬집어보았다. 불행히도 꿈이 아니다. 리에프는 한숨을 폭 쉬고 여자 손님들을 헤쳐 지나가 매장 직원을 찾았다. 그리고 누나가 휴대폰 메세지로 보낸 쇼핑 목록을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여직원은 목록과 리에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살풋 웃으며 물건들을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매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리에프에게는 매장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돌아본다고 하지만 본다고 해서 뭐가 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곤 매니큐어와 그 옆에 따로 마련된 향수 코너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에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땀에 절은 남고생들만 우글거리는 남자 배구부에서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아주 은은하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코끝이 시린 향이다. 하루는 그가 지나가자 특유의 향이 코를 반짝하고 자극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쿠로상, 쿠로상한테서 항상 좋은 냄새가 나는데 무슨 향수 씀까? 리에프는 향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분명 어떤 이름 모를 브랜드가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답은, 아니 그의 표정은 아주 예상 외였다. 한쪽 눈썹만 늘어뜨린 채로, 조금은 난감하단 기색을 띄며 간단하게 답하는 그의 얼굴은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엄마가 향수를 좋아해서 집에 향수가 많아. 평소 배구 얘기 밖에 안 하는데다 그가 엄격한 지시를 내리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엄마'라는 단어가 나온 것도 뜻밖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쿠로오의 향이 날 때면 심장의 박동이 빨리지기 시작한 게.
리에프는 진열된 향수들의 설명을 읽었다. 사랑스럽고 수줍은 여성의 향기. 리에프는 어쩐지 이 향수를 사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어울릴 것이다. 리에프는 시향해보고 싶은 마음에 병을 쥐고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향해 분사했다. 강렬한 향이 얼굴 전체를 확 덮쳐와 기침까지 나왔다. 마침 리에프가 주문한 물건들을 들고 오던 직원이 그를 도와주며 시향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코끝에 찡하게 남은 잔향 때문에 코를 훌쩍이며 리에프는 매장을 나왔다. 아직도 향이 제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누군가 등을 찰싹 때렸다.
"여어, 리에프!"
"에- 엣, 쿠로상?"
"아침부터 웬일이야?"
"그, 그러는 쿠로상이야말로..."
쿠로오는 대답 대신 손에 든 커다란 상자가 든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주문해놓은 운동화가 오늘 아침에 들어왔다고 해서, 라고 한다. 제법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쿠로오를 보면서 리에프는 생각한다. 아, 역시 좋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심장이 또 빨라진다.
"너는?"
"전 누나 심부름 때문에...여."
"응? 화장품?"
쿠로오가 리에프에게 한 발짝 다가와 리에프의 손에 든 봉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리에프는 조금 민망해져서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한 발 가까워진 쿠로오에게서 그 만의 향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아까 직원이 뭐라고 했더라, 향수를 뿌릴 때에는 손목과 목덜미에 뿌려야 한다고 했는데. 리에프는 순간 쿠로오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손목도 붙잡아 그가 향수를 뿌린 곳에 코를 묻고 싶다. 본능에서 비롯된 갑작스런 충동에 리에프는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전 누나가 빨리 오라고 불러서 이만 가볼게여! 내일 봐여, 쿠로상!"
"어? 어엉~."
재빨리 뒤돌아 뛰어가는 리에프의 뒷모습을 보며 쿠로오는 미소 지었다. 방금 리에프에게서는 싸구려 향수 향이 났다. 어머니 덕에 냄새에 민감한 코를 갖게 된 쿠로오는 리에프와 마주치자마자 향을 감별할 수 있었다. 여자 향수지만 누굴 만나서 묻힌 것 같진 않고 아마 화장품 매장에서 뿌리다가 묻은 거겠지. 리에프 본인은 모를 테지만 그에게도 특유의 냄새가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체취라는 것이다. 리에프의 체취는 보통 남고생들의 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그것과 구별되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 처음엔 러시아인과 혼혈이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리에프를 보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건 그에게 내재된 동물적 본능에서 비롯한 것이다. 가끔 리에프가 동공을 확장한 채로 스파이크를 날릴 때면 쿠로오는 그 체취를 더 강하게 느꼈다.
거기에 달달한 여자 향수의 향이 더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 했지만 의외의 조합은 제법 그럴싸했다. 좋은 향수는 아니라서 단층적인 향 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런 점이 단순한 리에프와 어울린다. 그리고 사랑을 바라는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향 자체가 리에프 안의 본능을 더 강하게 드러내 보인다. 덕분에 쿠로오는 리에프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가늘어지며 그의 손이 움찔한 찰나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향수를 뿌린다면 더욱 재밌을 것이다. 쿠로오는 언젠가 리에프를 집으로 초대해 이런저런 향수를 시도할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코에서는 절로 흥얼거림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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