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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디

[녤옹] Cotton Candy Collision - 03







  ", 솔직히 말해봐. 사람 좋아하는 맞지?"

  ", 맞다."

  "이거 또⋯, ?"


  오십여 회에 걸친 자기 부정과 삼십여 잔에 걸친 소주 투여가 있은 후에야 솔직한 감정을 실토하리라 예상했던 재환은 뜻밖의 다니엘의 신속한 자기 고백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다음 대사 그거 아니야, 다시 컷트. 그렇게 장난을 치고 싶었는데 맞다고 인정하는 얼굴이 심각하기 그지 없어 장난도 치고 눈치만 살폈다. 점심까지만 해도 재환의 추궁에 절대 아니라고 대답하던 다니엘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얼굴만 살펴서는 길이 없었다. 세상 심각한 얼굴로 소주 잔을 털어넣는 다니엘이 넘긴 잔의 수는 삼십 만에 이미 자리 수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침묵 속에서 알코올로 배만 가득 채울까봐 재환이 결국 물었다.


  "무슨 있었냐?"

  "병원서 만났다."

  "무슨 병원? 동물 병원?"

  ", 우리 동네라 카던데."

  "무슨 너는, 그것도 몰랐냐? 좋아한다면서 아는 없어."

  "맞나."


  단답 뒤에 다시 적막이 흐르기에 이번엔 재환이 말없이 다니엘의 잔을 채웠다. 다니엘은 알코올의 향과 결에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기계적으로 잔을 들이키고는 손으로 잔을 채웠다. 그만 마시라는 말은 들을 같지도 않아 재환은 차라리 대화로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현타 와서 그래?"

  "아이다, 그런 ."

  "그럼 이렇게 들이부어."

  "그마, 인제 알았나 싶어가."

  "내가 얘기할 듣고?"

  "아인 알았지. 그렇게 헷갈렸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어떻게 아는데?"


  재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잔이 다니엘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안아주고픈데 안아주니까."


  잔의 가장자리를 긁는 다니엘의 손끝이 무뎠다. 파편뿐인 말이었지만 재환은 다년간의 짝사랑 경험에 빗대어 말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했다. 상대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누구에게나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과의 상호작용 없이도 시시각각 변하는 그에 대한 감정은 분명 다니엘에게 새로운 것이었고, 그래서 확신이 들었다. 그의 위로가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성우가 처음이었다. 위로가 되어주고 싶어도 그런 존재가 없다는 사실도. 쓰린 속이 다량의 알코올 때문만은 아니었다.


  ", ." 점점 울상이 되어가는 다니엘의 얼굴을 보고 기어이 재환이 먼저 술을 권하고 말았다. 다니엘은 잔을 받자마자 부딪히지도 않고 그대로 털어넣어버렸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은 마음을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쉬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에 대해 고민한 전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제껏 성우를 단순한 호기심으로 대했다면 지금은 혹여나 마음이 잘못 전해질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다. 이미 늦은 마음이니 여기서 실수를 하거나 오해를 만드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고백하거나 마음을 알아달라고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마음이 온통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강다니엘 짝사랑하네."

  "맞나."

  "그래, 맞다."


  시시한 말장난을 주고 받으면서 지나간 연인들을 떠올렸다. 자신을 짝사랑한 이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입안이 썼다. 그에게 같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만일 이대로 짝사랑으로 끝날 셈이라면 그가 미처 잡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사랑을 아쉬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짝사랑이 그랬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자꾸 하한선을 긋고, 실망하기를 기대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다니엘은 고개를 한껏 젖혀 술잔을 연거푸 삼켰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을 있을 같아 날이 밝을 때까지 번이나 고개를 젖혔다.



다니엘은 성우에게서 거리를 두기로 했다. 애초에 멋대로 멀어지거나 좁힐 없는 거리인 알지만 일단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그런 다짐은 성우도 여실히 느낄 있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용과 목적이 상이한 질문들을 끈질기게 하던 시간에 다니엘이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커피는 곧잘 사다주었다. 커피를 내밀면서 하고 싶은 말들을 끝에서 고르다가 삼켜버리는 훤히 보였다. 그렇게 숨겨서 어떡해, 성우 역시 무심코 나올 뻔한 핀잔을 여러 삼켰다. 그는 다니엘의 그런 모습들이 결코 낯설지 않았다. 욕망이 노골(露骨) 드러난 눈빛과 걸음 다가가면 걸음 멀어질까 두려워 제자리에 묶인 걸음 모두, 성우는 자신의 그것과 겹쳐볼 있었다. 그런 다니엘의 마음을 누구보다 알고 있으니 응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알맞은 타이밍에 만났더라면, 마음에 누구도 품고 있지 않을 만났더라면 그가 다른 하나의 가능성이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덩치가 체격도 취향이었다. 그러나 성우에게는 지금 다른 가능성에 돌릴 여유가 없었다. 짝사랑하는 선배와의 관계가 어긋날수록 마음은 가파르게 되었다. 초조함이 불쑥 업무 중에 드러났고, 초과 근무로 피곤한데도 헤아릴 없는 고민에 잠에 들기 어려워 피로가 고스란히 다음날로 이어지는 바람에 악순환이 반복됐다. 성우의 짝사랑은 이런식이었다. 일부러 희망도 답도 없는 조건을 고른 것마냥 같은 상대에게 심신을 갉아먹는 감정을 헌신했다. 당장의 감정을 쏟아내는 데에만 열중했고 상대에게 마음을 보답 받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인지 누가 성우에게 먼저 관심을 표하거나 정을 붙이려 하면 그는 오히려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성우의 이런 성향은 일종의 '관성(慣性)' 같은 것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지만 자의로 고리를 잘라내기는 어려웠다.


  감정 소모에 지친 스스로를 업무로 다그치는 역시 버릇 같은 것이었다. 마침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있기는 했지만 성우는 실제 해야하는 업무량보다 과도한 일을 해내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일에 매몰된 동안에는 감정 상태를 곱씹지 않아도 되어서, 가슴을 죄는 답답함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감을 얻을 있었고 그게 그가 아는 유일한 도피법이었다.

  늦은 오후에 선배에게서 문자 하나를 받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긴 같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마음이 주체할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문자를 받은 직후에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돼버려서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정신을 차릴쯤에는 퇴근 정시가 가까웠다. 그제야 일을 재개한 성우는 정시가 넘어서도 남았고, 함께 야근하던 팀원들이 퇴근한 열한 시에도 남았고, 건물 관리인들마저 떠난 새벽 시에도 남아 있었다. 최근 성우가 야근을 하면 일찍 들어가서 챙기라며 은근슬쩍 잔소리를 하던 다니엘은 하필 월차로 휴가를 성우의 사정을 없었다. 퇴근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퇴근할 있었지만 성우는 굳이 동이 때까지 버텼다. 초여름이었고, 날은 일찌감치 밝아지기 시작했지만 성우의 얼굴은 피로와 수심으로 그늘만 가득했다. 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키자 성우는 휴가원을 작성해 출력한 부장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몸이 좋아 쉬겠다는 문자도 이미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마음 먹고 나서야 외면했던 육체적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대로는 손으로 운전은 하지 싶었다. 남의 손에 맡기는 싫어해서 대리운전을 부른 적도 손에 꼽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업체를 찾아 전화해야 했다. 결국 성우는 검색해서 최상단에 뜨는 업체에 전화한 주소를 불러주고 나서야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침까지 버틴 용할 정도로 눈이 자꾸 감겼다. 깜빡 조는 사이 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이 보였다. 다니엘이었다.


  "팀장님?"

  ", 다니엘 ."

  "설마. 아니, 이거 방금 내려온 건데, 지금 퇴근하는 거예요?"

  "그렇게 됐어요."


  아무래도 성우가 제대로 대답을 상태가 아닌 같아 다니엘은 엘리베이터의 화살표가 아래로 향하는 것도 무시하고 얼른 올라탔다.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성우의 몸은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엘리베이터의 작은 진동에도 좌우로 흔들렸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층에서 멈췄다. 성우가 먼저 내렸고 다니엘도 따라 내렸다. 다니엘의 행선지가 주차장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지만 성우는 다니엘을 제지하거나 따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앞까지 따라오자 키를 넘겨주며 말했다.


  "다니엘 ,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대리 불렀는데, 기사님 때까지 내가 깨어 있을 같아. 그때까지 잠깐만 있어줄 있어요?"


  다니엘이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성우는 뒷좌석 문을 열어 차에 탑승했다. 신속함에 어안이 벙벙해진 다니엘은 성우가 안에서 부를 때까지 차에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 면허 있죠? 미안한데 회사 바깥까지 운전해줄 있어요? 기사님이 여기까진 들어올 같은데⋯." 갈수록 음량이 줄어드는 서서히 곯아떨어지고 있는 분명했다. 아직 닫히지 않은 뒷문을 통해 확인하니 안쪽 자리까지 들어가 앉은 자세로 몸을 최대한 편하게 누인 성우가 보였다. 이미 작은 뒤통수는 시트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었고 눈은 감은 채였다. 이렇게 갑자기 무방비한 모습을 보일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부탁 받은 일은 완수해야 했다. 운전은 하지 않는 편이지만 면허가 있고 동네 마실 정도는 다닐 수준이 된다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전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마자 백단향의 내음이 끼쳐왔다. 아침에 다니엘이 아주 일찍 와서 성우와 마주치면 종종 코끝을 스쳤던 향이었다. 향수도 아니고 자동차 방향제가 백단향일 뿐인데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동을 잡은 기어 레버 앞에는 홀더에 미처 치우지 못한 편의점 커피가 걸려 있었다. 굳이 꺼내보지 않아도 무슨 맛일지 짐작이 가능했다. 이렇게 사소한 취향을 하나 알아가면서 종내에는 전부를 알고 싶다, 그런 작은 바람이 자꾸 스며들었다.


  지하 주차장 바깥을 나오자 모습을 드러낸 얼마 되는 해가 아직 이른 시각임을 강렬히 알렸다. 지금 사무실에 돌아가도 늦지 않을 시각이었다. 늦어도 지각 여부를 확인할 상사도 자리에 없다. 룸미러를 통해 비친 상사는 벌써 곤히 잠든 했다. 이대로 대리 기사 손에 맡겨도 되는 걸까, 걱정이 성우의 전화가 울렸다. 다니엘은 냉큼 성우의 손에 느슨하게 쥐어져 있던 핸드폰을 낚아 대신 전화를 받았다. 차를 대어 놓은 위치를 설명해주려다, 마음을 바꿔 되려 묻고 말았다.


  " 집이 어디랍니까?"



다니엘이 성우의 앞까지 운전해 도착할 때까지, 성우는 빠진 잠에서 줄을 몰랐다. 회사에서 출발할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허리를 세운 자세에서 각도가 점점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애매하게 기운 채로 멈춰버렸다는 것뿐이었다. 불편하지도 않나, 앞에 도착해서도 성우는 자세를 고치고거나 일어날 기미조차 없었다. 어차피 내려야 하니 깨울까도 싶었지만 달게 자는 얼굴이 고단해서 보다 못해 운전석에서 나와 뒷좌석으로 돌아가 기울어진 몸을 편히 뉘였다. 어찌나 깊은 잠을 자는지 조막만 머리통을 손바닥 위에 올려 옮기는 와중에도 눈살 찌푸리지 않았다. 있을 제법 대외행사에서 발표를 맡아 바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 무리를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다. 회사에서 기대치도 크고 하려는 마음이 사람이기 때문에 종종 무리할 때도 있지만 상하고 컨디션 조절하는 것까지 생각 못하고 만용을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니엘은 겨우 하루 사이 성우가 의외의 행동을 보인 것이 탓인 같아 자의식이 과잉된 가책을 느꼈다.


  새근 잠든 얼굴이 수척해보이는 단순히 업무로 밤을 지새운 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물어볼 있다면 좋으련만, 단잠을 깨울 수도 없고 깨운다 해도 처지에 물을 없는 질문이었다. 시계는 고작 아홉 시를 가리켰는데, 마음은 새벽비를 맞은 것처럼 부슬거렸다. 다니엘은 요즘 성우를 때마다 새로운 자신과 마주쳤다. 전에 없던 생각이 불쑥 들었고, 전에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자꾸만 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안아주고 싶다고, 반복해서 했다.


  "팀장님."


  성우는 대답이 없었다.


  "많이 힘들어요?"


  다니엘은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구기고 누운 성우 앞에 구부려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메마른 인상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눈코입이 생각보다 오밀조밀 동그래서, 이대로 키스해도 용서해 너른 아량을 갖고 있을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고마 힘들어해요. 힘들어하면, 팀장님 안아버릴 지도 모르는데."


  매번 삼켜왔던 말을 실수인 흘려버려도 같은 착각도.


  " 팀장님 좋아해요, 그거 한대요, 짝사랑."


  그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요. 여전히 하지 못한 말들은 목울대에서 맴돌다가 넘어가버린다.

  그렇게 성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하지 못한 말들을 헤아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좌석의 창문을 반뼘 만큼 열어 통풍이 되도록 하고 키는 뽑아서 콘솔 박스 위에 올려놓았다. 하고 싶은 말들 대신에 간단한 문자도 남겼다. 안쪽에서 문을 잠그고, 성우가 누워있는 뒷좌석의 문을 닫았다. 조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다니엘이 떠나고 더이상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확신한 성우는 눈을 가만히 떴다. 낮은 천장과 아직 훤한 아침의 햇살이 차창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좌석에 알맞게 구긴 옆에 놓인 핸드폰을 먼저 확인했다. 아까 다니엘이 열심히 똑딱거리며 보낸 문자가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글자 하나하나에 상냥함이 깃들어 있다. 아직 다정이 낯선 성우는 문자를 여러 되새기다가 핸드폰을 뒤집었다. 머리를 비우고 싶은데, 이번에는 성우가 잠든 알고 머리맡에서 고백해버리고 다니엘의 혼잣말들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받아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저에게도 다정에 익숙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버릇이 다정을 떼는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안다.


  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세워 앉아 다시 핸드폰을 켜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잠깐 만날래요?"


  성우는 말하고 있는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옹성우 팀장이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무성한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느 때보다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성우에게 연애를 하고 있느냐 물으면 미소와 함께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쉽다, 부럽다, 시샘을 하는 이들도 많았고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도 많았지만 다니엘은 어느 부류에도 들지 않았다. 그는 성우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눈치챘으나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성우가 처음으로 사내의 누군가의 질문에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았을 재환에게 전화를 그가 반응의 전부였다. '사귄다카더라.' 목소리가 내용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평범해서 재환은 눈치 없이 다니엘의 말을 여러 되물어야 했다. ' 마실래?' 끝내 나온 재환의 제안에 다니엘은 됐다고만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아프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몰랐던 것도 아니다. 사귀는 사람은 바로 사람인 했다. 성우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떠도는 소리나 그의 표정만 보아도 있었다. 만나본 적도,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 상대의 얼굴을 그리다가 그만두기를 수차례였다. 성우를 만나고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중에서 고백할 있었던 백가지 순간들을 떠올렸고, 순간에 있었던 천가지의 고백을 나열해보았지만 이미 지난 시간들이었다. 성우가 다른 사랑을 찾은 순간 짝사랑도 같이 끝난다면 좋을 텐데, 얄밉게도 심장은 성우와 마주칠 때마다 내려앉을 것처럼 뛰었고 덕분에 다니엘은 며칠을 반복되는 통증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이대로 짝사랑이 끝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현실적이지 않은 가정(假定) 알면서도 불안함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모든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성우가 하고 있는 연애도 언젠가 끝날 터였다. 양심의 가책을 동반한 배덕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니엘은 끝을 졈쳐보지 않을 없었다. 만일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까지 계속될 짝사랑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다니엘은 확신했다. 회사에서 성우와 마주치는 순간 그의 일면 밝아보이는 미소 끝에 걸린 불안정함을 포착할 때마다 믿음은 강해졌다.


  믿음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성우는 전에 없이 흡연실을 자주 찾았다. 담배를 피우기는 했지만 회사에서는 거의 피우지 않았고 집에서 자기 전에 피우는 식이었던 그가 사내 흡연실을 자주 찾는다는 스트레스가 늘었다는 뜻했다. 일주일에 갑을 피웠으나 하루에 개비씩 늘더니 이제는 아침마다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거나, 사내 흡연실에서 초점 없이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성우의 모습을 자주 보게 것도 다니엘에게 생긴 새로운 변화였다. 아침 일찍 나와 성우와 마주치면 코끝을 스치던 백단향 대신 밀도 있는 멘솔 향을 맡을 있었다. 아침에만 아니라 점심 전후로, 오후 회의 중에도, 퇴근하겠다며 인사를 때에도, 요즘 성우에게서는 쨍한 멘솔 향이 났다. 마치 신호탄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숨길 없는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누가 성우에게 갑자기 흡연량이 이렇게 늘었냐며 물으면 친구한테 옮았다면서 실없이 웃었다. 그게 거짓인 알면서도 자세한 사정을 묻거나 지나가는 말로도 금연을 충고하지 않았던 이유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서 인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만 준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을 텐데. 짝사랑을 하는 주제에, 다니엘은 성우도 자신을 조금이나마 여지에 두기를 바랐다.


  사내 흡연구역은 건물 바깥 모서리에 하나, 그리고 성우와 다니엘이 쓰는 사무실이 있는 층에 하나가 있었다. 층에 있는 흡연구역은 테라스에 설치된 실외용이어서, 통유리를 통해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흡연구역을 수는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곳이었다. 다니엘은 성우가 담배를 가끔 피우던 시절에는 층까지 나가서 피웠지만 피우는 주기가 짧아진 이후로 흡연구역을 애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대한 표가 나게 인적이 드문 시간대를 골라서 가고 있지만 항상 성우를 주시하고 있는 다니엘의 눈에 유독 탓이었다. 다니엘은 그가 특히 모두가 퇴근 정시를 맞추기 위해 바쁜 다섯 반에서 여섯 사이에 자주 간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이전의 다니엘이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특징이었다. 마침 시계가 다섯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시계를 확인한 직후 성우의 자리로 고개를 돌리자 전화를 받으면서 자리를 나서는 그가 보였다.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나가는 모습이 업무 상의 전화를 받는 것은 아닌 같았다. 성우가 나간 다니엘은 괜히 시계를 흘끔거렸다. 그가 자리를 나선 5, 6 40, 오래 걸리는 통화일 수도 있다, 9 10, 9 30, 10 5, 심각한 내용이라면 오래 걸리는 당연하다, 12- 거기까지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바깥 복도로 나왔다. 어디에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가서 망설임 없이 복도 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급한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흡연구역이 있는 테라스 문을 열었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연기를 싫어해서 실제로 흡연구역에 발을 딛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곳에 당연한 것처럼 성우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눈가가 붉었고, 호흡은 단정치 못했다. 무엇보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다니엘이 들어온 순간 놀란 모양인지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붙은 담배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성우를 안은 다니엘의 본능이었다. 생각이나 의지보다 몸의 반응이 빨랐다. 상상했던 것처럼 그를 안았다. 그의 위로가 되어, 미처 울음이 되지 못한 그가 놓아버릴 있기를 바란다. 괜찮아요, 팀장님. 빈말인 알면서도 다니엘은 성우의 등을 쓰다듬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요. 빈말인 알면서도 성우는 말을 들으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찮아요. 말에는 성우도 다니엘의 등에 팔을 둘러 그를 안았다. 삼켜버린 줄로만 알았던 말이 안정을 되찾아 감에 따라 입밖으로 새어나왔다.


  "다니엘 ."

  "."

  " 좋아해요?"

  "."


  성우의 손이 다니엘의 팔뚝을 찾아 붙들었다. 그럼 놓지 마요.


  " 놔요, 절대."


  이것이 누구나 꿈꾸는 짝사랑의 성취는 아닐 것이다. 다니엘은 아무래도 좋았다. 성우가 그저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 잡은 것일지라도, 그게 어쩌다 자신일지라도 좋았다. 당장의 시작이 엉망이어도 완벽한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 같은 없었다. 어쩌면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지금 안에 들어왔다면 놓치지 않아야 한다.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숨결에 섞이지 못한 멘솔 아래로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성우의 열망이 느껴졌다. 날숨 하나에 잦아든 그의 열기 조각까지, 다니엘은 놓치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