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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디

[규겸] The First of Everything (겸른전력)


*겸른전력 1차 주제 [처음], [파편] 에 맞춰 쓴 글입니다.

**민규와 석민의 '처음'인 순간들을 짜깁기 한 글입니다. 각 파트는 서로 다른 평행세계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습니다.







1.



  "나 내일부터 3박 4일 출장 가."


  잘 먹었습니다, 와 같은 어조로 민규가 말했다. 그래서 석민은 하마터면 응 하고 대답하고 말 뻔 했다. 민규가 석민의 무덤덤한 반응에 아무렇지 않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석민은 민규가 식탁에서 일어나 서류가방을 챙길 때에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내일 출장 간다고."

  "어디로?"

  "베이징."

  "왜?"

  "중국 출판 건 때문에 간다고 말했잖아."

  "언제?"

  "그저껜가?"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다. 석민은 이틀 전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날은 드물게 민규와 석민 둘 다 회사에서 정시 퇴근을 했던 것 같다. 간만에 제대로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같이 목욕을 한 후에는 섹스를 했었다. 피곤해서 정사 뒤 토끼가 구덩이에 빠지듯 잠에 들었는데 그 때 민규가 무어라 말했던 것도 같다. 물론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아침에 민규가 깨우는 소리도 못 듣고 늦잠도 잤다.


  석민이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민규는 벌써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석민은 다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브리프만 입어 맨다리를 휘적거리며 현관 앞에 섰다. 평소처럼 캐주얼한 세미 정장을 차려 입은 민규가 석민의 볼에 키스를 했다.


  "다녀온다. 이따 출근 잘 하고."

  "어, 응."


  현관문이 열리고, 민규가 나갔다. 다시 현관문이 닫혔다. 그러는 사이 석민은 다른 말은 하지 못 했다. 그리고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아침상을 치우고 30분 뒤에 출근을 했다.





2.



내 생각엔, 우린 이제까지 항상 같은 길을 걸어왔던 것 같아. 중학교 때부터 계속 거의 같은 반이었고, 뭐 너도 알다시피 맨날 붙어다녔잖아. 거의 매일 얼굴 봤다고. 아니다, 진짜 매일 봤나? 어쨌든, 서로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질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대책은 없었던 거지. 매일 같이 공유하는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고 지냈었는데, 갑자기 서로 다른 생활을 하게 되니까 적응이 안 되는 거야. 진짜 나 새내기 때는 우리 일주일에 겨우 두 번 밖에 안 만났는데도 갈수록 할 말이 떨어져서 겁나 어색했다니까? 그런 건 처음이었다고. 김민규는 맨날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고. 나도 과제니 뭐니 힘든데 걔 앞에서 힘들다고 입 뻥긋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까 만나는 거나 연락하는 거나 점점 뜸해지더라. 이게 말로만 듣던 권태긴가? 그런 생각도 들고. 뭐? 애늙은이라서 그런 거 아니거든? 사귄 지 3년 다 돼 가. 그니까, 미쳤지. 근데 존나 갑자기 신검 받으라 그러지, 받으러 갔더니 김민규는 면제고 나는 너무너무 건강해서 1급 나오고. 아니, 어떻게 걔가 면제고 내가 1급이야? 솔직히 걔가 그렇게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니 뭐 부정교합이 심하다나 어쩐다나. 몰라, 사실 면제라는 거 듣고 나선 열 받아서 제대로 듣지도 않았어. 근데 이게 또 걔한테 화낼 일이 아니잖아? 생각해보니까 화낼 일도 아닌데, 또 화내고 있는 내가 존나 이상한 거야. 근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럼 내가 군대 가 있는 동안 지금보다 더 떨어져 있는 건데, 지금도 이런데, 그때는? 그때는 어떡해? 그런 생각이 드니까 존나 막막하고, 막- 답답해서 김민규랑 얘기하려고 하는데 약속 잡기가 또 존나 힘들어요. 식당이 요즘 방송 타서 불티나게 바쁘시대. 일주일에 한 번 보면 운 좋은 거야. 그래서 아직까지 얘기도 못 하고 있다. 난 이미 병무청에 입대 날짜도 신청했는데. 언제로 신청했다고 말도 아직 못 했다고. 야, 이게 말이 되냐? 어? 야씨, 사람 존나 심각한 얘기하는데 조냐?





3.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석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제 결심부터 털어놓았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제대로 못한 민규는 지나치게 비장한 석민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혼자 타임머신이라도 탔어? 우리 그날 꽤 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시 처음 만난 것처럼 굴기야?"


  '그날'이나 지금이나 넉살 좋은 민규의 태도에 석민의 미간은 고뇌로 더 깊게 패였다. 첫눈에 지랄 맞은 성격의 소유자들만 골라 사귀어 왔던 석민은 이번엔 꼭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좋은 사람을 만나는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타이밍이 안 좋다. 바로 지난 지랄 맞은 성격의 소유자와 깨끗하게 헤어지지 못해 그 놈을 다시 제 방에 들인 탓이다. 석민은 모든 것이 제 의도가 아니었노라 해명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모든 일이 이미 벌어지고 난 뒤였다. 게다가 민규의 웃는 얼굴을 보니 더욱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졌다. 아, 이 웃는 얼굴 진짜 귀엽고 잘생겼고 내 취향인데.


  "따지고 보면 초면이잖아요. 그날은 취했었고."

  "취한 건 안 치는 거야? 그러기엔 너무 좋았잖아. 섹스도 안 했는데 내가 또 만나자고 했으면 말 다 했지."

  "쉿! 아, 쫌!"

  "왜? 섹스가 뭐 어때서?"


  석민은 괜시리 고개를 낮추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둘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석민이 머쓱해하며 다시 고개를 들자 민규가 대놓고 크게 웃었다. 그제야 몇몇 사람들이 민규에게 눈길을 주었다. 석민은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살짝 고개를 낮추었다.


  "그만 웃어요."

  "미안, 진짜 귀여워서."

  "그만해요."

  "알았어, 그만할 테니까 왜 안되겠다는 건지 말해줘."


  으으. 석민이 앓는 소리를 내자 민규의 눈가가 더욱 가늘어졌다. 어쩌지, 정말 엄청난 이유가 아니고서야 꼭 만나보고 싶은데. 민규는 석민이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입맛을 다셨다.


  "그, 전 남친이,"

  "아, 그 개새끼?"

  "네, 그 개새끼가⋯"

  "널 또 귀찮게 해? 내가 내쫓아줄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것보다 그런 태도 좀 그만두지? 걔가 싫으면 내가 알아서 쫓아내."


  순간 민규의 얼굴이 공백으로 물들었다가 급하게 현실로 돌아왔다. 그날도 만만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석민은 민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석민은 어느새 주춤거리던 태도를 싹 접은 채 민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매력적이라기보다 경쟁심과 경계심을 자극하는 태도였는데, 어째서인지 성욕과 아주 비슷한 욕구를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다. 민규의 속이 끓었다.


  "아무튼, 어쩌다 보니까 그놈이랑 다시 만나게 됐어요. 그러니까 안돼요."

  "엥, 다시 존댓말?"

  "언제부터 친했다고."

  "허, 참. 뭐, 무슨 말인진 알겠어. 그럼 우리 다음에 언제 볼까?"

  "네?"


  원래 이런 미친놈이었나, 석민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덕분에 민규는 석민의 의중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데이트 아니야. 그냥 친구로 만나자는 거지. 친구부터 해도 되잖아?"

  "'부터'요?"

  "그 전남친이랑 평생 사귈 건 아니잖아. 근데 난 너 평생 만나고 싶으니까 다음 약속 잡자고."


  석민은 그의 대쉬에 얼굴을 붉혀야 할지, 헛소리 그만하라고 중지를 내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일단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건 취소다. 오히려 미친놈에 가까운데, 문제는 그게 싫지만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거 사주에 있는 게 분명해, 지랄 맞은 놈만 사귀는 팔자. 민규의 웃는 얼굴을 보며, 석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4.



민규는 방금 전 석민과 다투고 난 분을 삭히지 못해 현관문을 쾅 닫고 집에 들어섰다. 신발을 벗는 것부터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는 바람에 엉망이었다. 가방과 자켓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뒤에 소파에 드러누웠다. 석민과 다툰 적이야 물론 많았지만, 이렇게 언성을 높였던 적은 없었다. 아직까지 격앙된 석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석민은 늘 민규보다 감정을 조절하는 데 능숙했기에, 석민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마주한 민규는 그것들이 당황스러웠고 외면하고 싶었다. 당연히 민규의 그런 반응은 석민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고, 민규도 질세라 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다툼은 절정을 찍고 먼저 피로감을 느낀 석민이 연락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가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말로 헤어진 건가. 민규는 처음 맛본 이별에 슬픔보다 허망함을 느꼈다. 감정의 극치에 달했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박탈 당한 기분이었다. 석민과 숱하게 같이 들으며 불렀던 이별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떠올랐다. 딱히 자신의 얘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비슷비슷한 노래 가사들을 곱씹으며 민규는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보통 헤어지면 친구 불러서 술을 마시거나, 어쨌든 알코올이 들어가던데. 아니면 전화나 문자로 진상을 부리거나. 같이 갔던 장소들을 되짚으며 청승을 부리거나. 서로 주고 받은 편지나 물건들을 모아놓고 불에 태우거나. 불에 태우는 건 너무 구식 냄새가 나기도 하거니와, 생각해보니 석민에게 받은 편지 같은 것들이 많지도 않았다. 석민은 민규와 달리 글쓰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도 항상 한 번 접어두었다가 펼치는 편이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민규와는 달랐다. 어쩌면 용케 여기까지 왔는 지도 몰라. 민규는 새삼스럽게 서로의 차이점을 되새기며 지난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르기 때문에 좋아했던 점들이 어느샌가 다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정확한 시점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너무 익숙한 탓도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던 기억의 흐름을 타고, 다시 가장 가까운 기억에 도달했다. 전에 없이 화내던 석민의 모습,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해 눈가에 물이 가득했다. 석민이 우는 모습은 섹스 할 때를 포함하더라도 드물었다. 울 때는 꼭 눈가를 비롯해 코끝과 귓가가 붉어졌다. 그러면 꼭 그 붉어진 경계를 따라 손으로 만지고 싶은 욕구가 들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석민에게 한소리 더 들어야 했다. 목에 선 핏대는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파랗고, 동시에 빨간 것이 존재하는 구나. 여기에 발정했다고 하면 정말 다시는 얼굴을 못 볼까봐 말을 아꼈지만 화내는 석민의 모습은 민규 안에 있는 충동의 트리거(trigger) 그 이상이었다. 그런 모습 또 보게 될 수 있을까. 이 현실감 없는 이별에 확신이 없다.


  이제 씻어야지, 하고 몸을 일으킨 민규는 다리 사이의 이물감에 멈춰섰다. 아, 섰다.





5.



석민은 곤히 잠든 민규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엄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그의 코를 가만히 쥐었다. 새록새록 오르내리던 숨이 갑작스레 막히자 커커컹 하는 소리와 함께 민규가 번쩍 눈을 떴다. 헉, 뭐야! 석민은 놀란 민규가 더 얄미웠다.


  "야, 힘든 건 난데 왜 니가 처 자?"

  "졸리니까 자지. 너도 얼른 자."

  "잠이 오냐?"


  속도 편해. 핀잔을 준 석민은 그제서야 민규 옆에 천장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웠다. 어찌나 몸에 힘을 주었던지 첫 섹스의 여운은 섹스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기 무섭게 찾아왔다. 벌써 근육통이 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픈 건 줄 알았으면 내가 탑 한다고 할걸. 석민은 뒤늦은 후회를 해보았지만 사실 바텀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아마 다음에도 못 이기는 척 바텀을 하게 되리라는 걸 내심 알고 있다.


  민규가 석민 쪽으로 몸을 돌려 그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채 가시지 않은 정사의 미온이 감돌았다.


  "좋았어?"

  "야, 진짜. 그 소리 왜 안 하나 했다."

  "왜애-"

  "깨니까 더 말하지 마."

  "깨울 땐 언제고."


  민규가 투덜거리며 다시 천장을 바라보도록 몸을 돌려 누웠다. 서로의 체온이 맞대고 있는 살결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이런 날들이 몇 번이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묘하게 편해졌다. 석민은 자냐고 묻는 민규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금세 잠이 들었다.





6.



녹화가 끝나고 방송국을 빠져나오면서 석민은 드물게 말이 없었다. 순영이 석민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지만 피곤하다는 말로 답할 뿐이었다. 장장 9시간에 걸친 촬영을 끝냈으니, 순영도 그러려니 수긍하고 다 같이 승합차에 올라탔다. 다들 피곤한지 차가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각자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석민 역시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을 힘도 없어 고개만 떨구었다. 녹화하는 내내 시선이 그를 좇았던 것 같다. 그가 촬영장에서 보여준 모습들이, 새로운 모습인 것도 아니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면서 보아온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오늘 누구보다 빛나 보였다. 그것은 그가 가진 그만의 자질 덕분이었다.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넉살, 맘껏 개방성을 자랑하는 그 호기, 분명 그만의 것이고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다. 막연히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마음이 심란할 정도로 의식했던 적은 없었다. 질투인가. 쉽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석민은 쉬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유달리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다.





7.



인류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인 것은 언제였을까. 인류의 첫 사랑처럼 나는 너에 대한 내 모든 감정에 낯설었다. 무어라 이름 붙여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다만 그것은 도화선이 되어 곧 내 온몸을 집어삼킬 것 같은 압도가 되었다. 나는 기꺼이 압력에 몸을 내어주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도, 나는 내 몸을 감싸는 이 새로운 감각과 미지에 얼마든지 내 자신을 맡길 테다. 그것이 내가 너를 기꺼이 여기는 마음의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