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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디

[솔겸] Happy for your Ending (겸른합작)


*겸른합작(flowerdk.dothome.co.kr)에 버논X도겸, '칸나'로 참여한 글입니다.






2113년, 인류는 완전 멸망을 목전에 두었다. 결국 핵이었다. 92%의 대지가 오염되었고, 나머지 오염되지 않은 땅 중에서도 지하 시설이나 방진막이 설치된 70%의 땅에 19%로 감소된 인류가 밀집되어 살았다.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과학자를 자처했던 사람들도 거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남은 과학자들이 죽을 힘을 다해 연구한 결과, 현재로선 인류가 재기할 방법은 전혀 없으며 당장 취할 수 있는 공기와 물이나마 소중히 여기며 목숨을 부지하다가 다가올 멸종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것도 길어야 30년 이내였다. 명쾌하고도 확고부동하게 '절멸'만이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근미래였다. 차라리 외계의 진화한 이종족에 의한 멸종이었다면 덜한 무기력함을 느꼈을 테지만, 인류는 스스로 아주 오래 전부터 우려해온 '자멸'이라는 선택지에 도달했고, 일말의 희망도 없이 죽음과 같은 참담함이 생존한 이들을 지배했다. 그럼에도 혹 10년이라는 시간 내에 피어날 재생의 가능성에 기대를 건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석민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남은 과학자들 중 한 명이며, 남은 인류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어떤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확정된 죽음으로 악명이 높은 장기 탐사대에 자원한 것도 그런 책임감의 발로에서였다.


  석민을 포함해 다섯 명의 사람이 육중한 철문을 열고 지하 시설을 나섰다. 그들은 각자 어떤 분야에서의 과학자이거나, 생계를 위한 탐험가이거나, 혹은 재앙 전에 군인이었던 사람이었다. 목표는 일주일 이내에 다음 세 가지의 미션 중 하나라도 완수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1)생계 유지에 필요한 자원을 습득한다. 2)현재까지 확인된 다른 공동체 외에 새로운 공동체나 떠도는 사람을 발견할 시 정보를 습득하고, 공동체와는 네트워크 구축, 개인은 동행하여 귀환한다. 3)인류의 재기에 도움이 될 만한 아주 사소한 가능성이라도 포착할 경우 반드시 본부와 연락한 뒤 습득하여 귀환한다. 탐사대는 본부를 중점으로 통신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각자 방위를 선택하여 흩어졌다. 이번 탐사가 석민에게 처음은 아니었기에 석민은 일전에 택하지 않았던 경로의 시작점을 밟았다. 눈앞은 온통 사막이었다. 분명 몇 년 전 이곳은 전혀 사막이 아니었으나 습기를 머금은 흙이 불모의 황무지로 변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방독면과 고글, 두건으로 중무장을 했지만 생명에 치명적인 유독 물질과 함께 사막의 지독한 모래가 휘몰아치며 석민을 위협했다. 석민은 모래바람을 뚫고 어디로 닿을지, 무엇이 존재할지, 혹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는 곳으로 꾸준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탐사 첫째 날, 석민은 생존했다. 겨우 사막 지역을 벗어난 것은 행운이었으나 출발할 때 목표로 했던 방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예상 가능한 불운이었으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처음 밟는 경로를 택하긴 했지만 지나오면서 새로이 발견한 것은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익숙한 모래 황무지와 그 속에 파묻힌 도시의 흔적이었다. 바깥에선 너무 흔한 것이기 때문에 기록할 의미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비상 시, 즉 탐사대의 목표 달성 시에 대비한 통신도 울리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도 모두 석민과 비슷한 첫 날을 보낸 모양이었다. 석민은 일지의 맨 첫 장에 '특이사항 없음'을 적어 넣었다.


  둘째 날도 석민은 생존했다. 그러나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가 있었다. 사막 지역을 벗어난 뒤 그는 폐허가 됐지만 아직 모래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은 도시에 들어섰다. 도시의 본래 모습과 이름은 잊힌 지 오래였지만 석민이 갖고 있는 지도 데이터에 '버려진 도시 00'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데이터에 기록된 대로 도시의 지형을 살피며 조사하던 중 석민은 지반이 함몰된 곳에 발을 헛디뎌 하수구에 빠졌다. 그간 몇 차례의 모래폭풍과 지진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건물들이 무너지고 지반이 더 약해진 탓이었다. 추락의 충격으로 방독면이 떨어졌고, 석민은 수 초간 유독 물질이 포함된 공기에 노출되었다. 다급히 방독면을 다시 착용하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조차 명치를 밀어올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숨쉬기가 힘들었다. 석민은 어지러이 숨을 몰아쉬며 배낭을 뒤져 해독제를 찾은 다음 팔뚝에 꽂았다. 곧 안정적인 호흡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목과 가슴께에 칼칼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해독제는 그가 거주하던 지하 시설 주위의 공기를 분석하여 그에 대해 제작된 것이므로, 시설에서 한참 떨어진, 게다가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은 하수구의 공기에는 더 유독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완벽한 해독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다행히 하수구를 빠져나오는 일은 쉬웠다. 하수구와 연결된 폐기된 지하 시설을 발견해 일단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일지의 두 번째 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갑작스레 봉착한 위기로 채워졌다. 석민은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지만 여느 때보다 크게 들리는 제 심장 소리에 쉬이 잠들 수 없었다.


  그리고 셋째 날이었다. 이 버려진 도시의 지하 시설 일부는 천장이 무너져 햇빛이 들었다. 그래서 석민은 수천 개의 모래폭풍이 자신이 살던 지하 시설의 철문 위를 휩쓸고 지나간 세월 동안 전혀 겪을 수 없었던, 햇빛에 눈을 뜨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웬일인지 오염된 공기 속에서 항상 어둑하던 햇빛이 그날만큼은 제법 맑은 빛을 내었다. 석민은 눈꺼풀 안쪽을 거침없이 찔러 들어오는 생경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지하 시설을 조사한 뒤에 이곳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이 지하 시설은 기존의 데이터에는 존재하지 않은 곳이었다. 데이터에 따르면 이 도시는 재앙이 일어나자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사라진 곳이기 때문에 지하 시설 같은 재앙 이후의 건물이 존재할 리 없었다. 위기가 있었지만 어쩌면 이것은 의외의 성과를 얻을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석민은 대기 중 물질과 지하 시설의 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분석기를 가방에서 꺼내 장착한 뒤 탐사를 시작했다. 전날 간신히 잠든 것 치곤 몸이 그렇게 무겁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숨 잔 덕인지 호흡은 한결 편해졌다. 지하 시설의 곳곳을 살피며 30여 분이 지난 뒤 분석기가 내놓은 대기 중 물질 분석 결과도 놀라웠다. 바깥보다 오염 수치가 월등히 낮았고, 심지어 인근 지대 중 비교적 청정 구역에 속하는 석민이 거주하는 지하 시설 근처의 대기보다도 오염도가 낮았다. 천장이 무너져 외부의 공기가 드나드는 폐기된 지하 시설의 오염 수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수상했다. 더구나 석민이 계속 지하 시설 안쪽으로 걸음을 강행했지만 완벽한 어둠 속에 갇힌 적은 없었다. 어느 곳이든지 천장에 구멍이 있어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햇빛이 석민의 발걸음을 놓치지 않고 비추었다.


  분석기가 엑스레이로 투시한 결과에 따르면 이 지하 시설은 그리 크지 않았다. 100명 정도를 수용될 수 있는 규모이며, 기존 데이터에 기록된 도시의 재앙 전 규모에 비하면 턱 없이 작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다수의 사람들을 대피시킬 목적으로 세워졌다기보다, 소수의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피신할 수 있었던 특별한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석민은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사건에 의해 무의미하게 되었을 그들의 특별함을 무색하게 여겼고, 일종의 동질감마저 느꼈다. 지금 자신을 비롯한 5명의 탐사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하고 있는 이 탐사도 그런 동질감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번 탐사에서 놀라운 성과, 즉 탐사의 3번째 목표에 해당하는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재기의 돌파구가 될지, 아니면 현재 최대 30년에 불과한 인류의 향후 기대 수명을 겨우 1, 2년 늘리는 것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류가 모여 만든 공동체 내에서 '과학자'라는 직무를 수행하며, 석민은 희망을 연기하는 동시에 속으로 끝없는 절망을 느꼈다. 재앙이 지나간 뒤에 살아있다고 한들 이 삶은 비참한 연명일 뿐이라고 늘 생각했다. 생존과 직결된 기술을 개발하는 입장에서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지만 석민에게 다가올 미래는 여지없는 죽음, 또는 멸종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공동체 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과학자이며, 빠른 죽음을 도래할 뿐인 탐사대에 자원한 것은 오로지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당장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또 그래야만 하는 정당성에 석민이 빠진다면, 그는 기꺼이 인류를 절멸시킬 파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석민은 항상 자기 안의 그 파괴적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오전 내내 구석구석 조사하여 기록한 뒤 시설 끄트머리에 '방'으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이곳이 마지막이었다. 다른 곳은 보통 지하 시설과 다름없었다. 특이 사항이 있다면 대기 분석 결과뿐이었는데, 원인불명의 이 현상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면 이 방에 있어야만 했다. 분명 특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인지 문 옆에는 부서진 보안 장치가 있었고, 엑스레이도 방 안을 투시하지 못했다. 석민은 닫혀 있는 문 앞에서 차분히 숨을 들이켰다. 호흡은 거의 추락 전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결리는 느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방 안의 무언가가 혹 재앙과 같은 것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잠시 들었다. 설마. 석민은 문을 열어 당겼다.


  피다. 아니, 붉은 빛이다. 종말이다. 아니, 빨간 꽃밭이다. 석민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차례 눈을 깜빡였다. 이런 곳에 생명이 있다. 그것도 수백, 아니 수천일지도 모를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였다. 그는 황급히 발 아래를 살폈다. 생명이 나고 자랄 수 있는 진짜 흙이었다. 어떻게? 머릿속의 선명한 의문을 의식할 정신을 되찾고 나서야 석민은 미친 듯이 귓전을 때리는 분석기의 알람을 눈치 챘다. 생체 반응 알람이었다. 꽃에? 아니, 그렇게 멍청한 기계는 아니다.


  소년이었다. 너무나도, 명백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석민은 방금 전 발견한 이 수천의 붉은 생명들보다 더 놀라운 존재에 경악하여 열광적으로 울리는 알람을 끌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겨우 열 걸음 앞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소년은 석민과 달리 그의 존재가 별로 놀랍지 않은지 석민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1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외양은 석민이 보아왔던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잠깐. 의문의 소년을 가늠하던 석민은 그의 이목구비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즉 이 소년이 방독면을 착용하지 않은 채 아주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계에 재분석을 명했다. 오염물질은 제로, 완전청정구역이다. 석민은 방독면을 벗어 던졌다. 숨을 들이키는 순간 수년간 맛보지 못 했던 맑은 공기가 기도를 타고 폐부를 찌르는 바람에 사레가 들렸다. 무릎을 짚고 호흡을 고르는 석민의 귀에 아주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그것은 물론, 석민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있다면, 절대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며, 석민이 희미하게 기억하는 아주 어렸을 적의 어느 즐거운 추억, 그 바탕에 깔린 정체 모를 음악 같은 것일 테다.


  "사람, 사람 맞죠?"


  석민이 다급하게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석민의 질문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대답했다.


  "나는 버논이에요."


  버논. 석민은 이름을 되씹었다. 그의 짧은 대답 하나에 정립되지 않은 질문들이 혀끝에서 순서를 다투었다.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줬는지, 사람이냐는 물음에 다소 특이한 반응을 보인 것이 혹시 생체형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인지, 이 시설의 목적은 무엇인지, '버논'은 사람의 이름이 맞는지, 어느 것부터 물어야 옳은지 판단이 안 섰다. 이럴 때 과학자의 두뇌라는 것은 참 쓸모없었다.


  "당신은요?"


  소년, 버논의 질문은 응당했지만 석민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버논의 눈동자에 비친 황망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석민은 가장 원초적인 질문에, 가장 명쾌한 대답을 주었다.


  "석민, 이석민이에요."


  탐사 3일째, 석민은 버논을 '발견'했다.



넷째 날, 석민은 버논에게 질문을 하는 데에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지는 못 했다. 석민이 어떻게든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려 여러 가지 형태로, 또 여러 가지 내용의 질문을 시도해보았지만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적었다. 버논이 대부분의 질문에 석민이 물었던 첫 질문에 대한 반응과 같은 모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버논은 석민이 가진 종류의 궁금증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렇다 할 질문도 하지 않았으며 마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대화를 나누듯 석민을 대했다. 게다가 버논이 갖고 있는 여유는  재앙 이후의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혹시 사람이 아닌 걸까, 잠시 그런 의문을 가졌지만 하루 동안 그를 지켜본 바로는 일반 사람과 다를 것 없이 밥을 먹고-방에 달려 있는 작은 식량 창고에 적어도 1년 치의 1인분 식량이 들어 있었다-, 잠을 자는 등 정상적인 생리활동을 했다. 그 외엔, 모든 것이 특이점이었다. 버논은 하루의 대부분을 꽃밭을 돌보거나 바깥에서 산책하며 보냈는데, 산책을 하러 나갈 때 천장이 무너진 잔해들을 가뿐하게 밟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고 그가 탁월한 운동신경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방의 천장은 다른 곳과 달리 2, 3개 층 높이 정도로 매우 높아 천장을 통과하면 바로 바깥과 연결되었고, 천장이 무너진 덕분에 햇빛이 들어와 꽃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것이었다. 그리고 버논은 바깥에 나갈 때도 방독면을 착용하지 않았다. 처음에 방독면도 없이 버논이 나가려 하자 석민이 놀라 붙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석민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동안 산책을 나갔다 온 뒤에도 버논은 나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멀쩡했다. 바깥의 공기는 분명 방독면 없이 나간다면 1시간 이내에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유독한 성분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 방이 청정구역인 것과 버논의 상관관계였다.


  당장 버논을 조사하고 싶었지만 석민의 짐에는 사람을 대상으로 검사할 수 있는 장비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석민은 일단 가설을 세웠다. 이 방의 환경이 버논에게 유독물질에 대한 면역체를 갖게끔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연관성이 큰 요소는 방 안을 가득 채운 붉은 꽃이었다. 석민은 이 꽃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식용이 아닌 살아있는 식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 존재가 그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탓이었다. 버논에게 묻자 그는 친구를 소개하듯 대답했다. '칸나'라고 해. 그 이름이 본래 꽃에 붙여진 품종명인지, 버논이 지어준 이름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가 꽃들을 무척 아낀다는 사실 만은 이곳에서 발견한 그 어떤 사실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석민은 과학자지?"


  지금껏 버논이 한 질문들 중 -석민의 기준에서- 가장 질문다운 질문이었다.


  "응, 그렇지."

  "근데 석민은 별로 과학자 같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알던 과학자들과 너무 달라."

  "네가 알던 과학자들은 어땠는데?"

  "나, 설명은 잘 못하지만-"


  파동이 달라. 버논은 정말 석민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그 파동이란 게 뭔데? 석민이 묻자 버논은 애를 쓰더니 겨우 답했다.


  "석민은 슬퍼 보여."

  "내가?"

  "응. 내가 아는 과학자들은 여기서 다들 행복해했어."

  "왜?"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죽었잖아."


  그렇지. 버논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침통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석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모래폭풍이, 버논은 한 숨을 들이켰다, 덮쳤어. 난 자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까 다 사라져 버렸어. 내가 아는 건 모두 사라졌어. 그 때, 지금 석민의 기분과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아. 너무 괴로웠으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석민에게 버논은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였지만 어쩌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버논이 훨씬 더 특별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민은 자신이 속해 있던 지하시설 공동체의 사람들과 지낼 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적 유대를 느꼈다. 그에게 버논은 완벽한 타인, 어쩌면 자신과 다른 종류의 생명체일 수 있는데도,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경계를 넘어선 어떤 강렬한 암묵적 합의에 도달하는 경험을 체험했다.


  석민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버논은 잠들기 전 석민에게 속삭였다.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달콤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석민은 본부에도, 동료 탐사대원들에게도 버논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잠이 들었다.



다섯째 날 아침이었다. 석민은 알람도, 햇빛도 아닌 매캐한 공기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눈을 뜨자 두 손가락으로 잡아쥘 수 있을 정도로 큰 알갱이의 모래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모래폭풍의 전조였다. 이곳의 쾌적한 환경에 익숙해진 석민은 잘 때도 방독면은 물론 고글도 벗어놓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어서 가방을- 흐릿해진 시야를 어떻게든 확보하려 했으나 눈꺼풀을 조금만 치켜 올려도 모래 알갱이에 노출되어 시력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모래 입자의 밀도가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 소매로 코와 입가를 가렸지만 이미 모래가 호흡기로 침투해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온 신경을 손끝에 모아 닥치는 대로 바닥을 헤집었다. 덜컥, 하고 손에 걸리는 게 있어 무작정 빼들었다. 석민의 가방이었다. 오로지 촉각에 의지해 가방 안에서 방독면을 꺼내려 했지만 다급한 마음에 손이 자꾸 더디었다. 게다가 몸 안에 들어간 모래들이 이미 유독 물질을 뿜어내고 있는 모양인지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날 밤 귓가에 닿았던 버논의 속삭임이 떠올랐다. 아직이야. 목소리가 어딘가에 대고 외쳤다.


  온통 잿빛이던 시야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티끌 한 점 없는 빛은 석민이 이곳에 와 처음 발견한 햇빛과 유사한 광채를 띠었다. 혹은 붉은 꽃밭이 뿜어내는 광륜과도 닮아 있었다. 구원의 성사(聖事)였다. 아니, 따가운 빛살 새로 들어오는 것은 벌써 익숙해진 버논의 윤곽이었다. 빛은 그에게서 나와, 점차로 석민의 모든 시계(視界)를 덮어, 석민이 속한 지하 시설을 포함한 인근 일대까지 모조리 뒤덮었다. 아득한 와중에도 가방 속의 통신기가 동시다발로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빛은 곧 그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지구에 최초로 일어난 이 기현상을, 석민은 어떠한 과학적 기기 없이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빛은 정화의 빛이다. 그리고 석민은 정신을 잃었다.



석민은 여섯째 날에 눈을 떴다. 세상이 뒤집어졌을 것으로 예상했던 석민은 눈을 떠도 변함없이 중력에 의해 몸을 땅에 붙이고 있다는 사실에 자못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장소는 그대로였다. 다만 꽃들이 모두 사라져 드러난 방의 맨 토양 위에 자신이 누워 있었고, 모래폭풍 때문인지 기현상 때문인지 모를 영향으로 인해 천장이 완전히 뚫려 차가운 밤 공기와 달빛이 그대로 석민에게 닿았다. 피부에 닿는 모든 촉감이 생경했다. 죽을 때까지, 혹은 죽는다 해도 다시는 겪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경험이었다.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 더 압도적인 격정이 석민을 휘감았다. 몇 번 깜빡이자 축축해진 눈가에 어느새 버논의 얼굴이 들어왔다.


  "괜찮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주제에 버논이 먼저 물었다. 석민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게 전부가 있었다. 상관관계 따위가 아니었다. 버논은 이 방이 존재하는 근거이자 이곳에서 피어난 새 생명의 근원이었다. 사실 석민은 버논과 마주친 첫 순간에 탐사의 최종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그의 능력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버논이 곧 인류 재기의 희망이라는 사실은 더욱 명백해졌지만 석민은 본부나 다른 대원들에게 그의 존재를 알릴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에게 버논은 '재기의 단초'보다 '절망의 종국'이었다.


  석민은 몸을 일으켜, 버논을 마주 보고 앉았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꽃은 어떻게 된 거야?"

  "소멸했어."

  "모래폭풍에 사라졌다는 거야?"

  "아니, 소멸한 거야. 내가."

  "⋯왜?"

  "석민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미안해."

  "아니야. 이건 칸나의 운명이야. 그리고 석민이 무사하니까 괜찮아."


  진심으로 안도하는 얼굴에 석민은 마땅히 답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버논에게 '칸나'가 어떤 의미였을지 감히 짐작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이기(利己)를 부리려 하고 있었다.


  "버논."


  그러나 이것이 자신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탁이 하나 있어."

  "응."

  "이 세계가 소멸되길 원해."


  설령 버논을 데리고 지하 시설로 돌아간다 해도, 재기에 대한 완벽한 보장은 없다. 게다가 정화는 파괴를 동반한다. 이 일대를 정화시키는 것만으로도 방은 형체와 그 기능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생 작업에 얼마만큼의 파괴가 발생할지 가늠할 수 없다. 무엇보다 생존한 인류에게 버논은 정화의 '도구'로 치부될 터였다. 석민은 이미 인류가 자초한 최악의 상황에 더 박차를 가할 촉진제를 손에 쥐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석민이 행복해지는 길이야?"


  응. 그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석민의 대답에 버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달빛조차 저물어 가고 있었다. 버논은 잠깐 일어서더니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꺾어 와 석민에게 내어 주었다. 전부 소멸된 줄로만 알았던 칸나였다. 석민이 이곳에서 본 어느 꽃보다 진한 다홍빛에 화려한 꽃잎을 갖추고 있었다.


  "방금 피운 칸나야."

  "⋯⋯."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마지막 칸나를 건네주는 버논의 손에서 더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석민은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다짐했다.


  "고마워."


  빛 속에서 아직 아니라고 외쳤던 목소리는 더는 없었다. 새로운 빛이 버논의 손에서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석민은 눈을 감았다. 온몸을 집어삼키는 빛 속에서 석민은 이미 행복을 느꼈다.



  탐사 일곱째 날, 석민은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