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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디

[솔겸] Dare I (주간겸른)

*주간겸른 18차 주제 '감히'에 맞춰 썼습니다.





버논은 오늘도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옆자리를 채워야 할 온기는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고 바깥에선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와 울음 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거실에 놓여 있는 1인용 소파 위에는 석민이 앉아 있었다. 석민은 버논의 기척에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연신 눈가의 눈물만 훔쳤다. 그런 석민의 곁에, 버논은 살며시 가 앉아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석민은 울음에 젖어 알아 듣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오지 말랬잖아." 어찌나 많이 울었는지 손수건은 물론 긴팔 옷의 소매까지 젖어 색의 경계가 생겼다. 버논은 석민의 어깨를 쥔 손에 온기를 더 가득 담았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널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석민이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는 없었지만 이내 버논의 소매 끝까지 눈물에 젖어 들었고,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석민의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를 더 강하게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패턴이 된 버논의 일상의 일부이자 하루의 시작이다.



거실에 놓인 시계의 숫자가 07:59에서 08:00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 정확한 순간에, 버논은 눈을 떴다. 어김없이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있었고, 가져 온 적 없는 이불이 몸을 덮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베이컨과 계란을 조리하는 냄새가 났다. 그는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그대로 덮은 채 일어나선 요리하고 있는 석민의 등 뒤로 가 껴안았다.


  "미안. 오늘은 내 당번인데."

  "아니야, 내가 일찍 일어난 김에 했어. 그리고 나 때문에 못 잤잖아."


  석민이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어 왔다. 버논은 입맞추면서 가늘게 뜬 눈 새로 부어 있는 석민의 눈꺼풀을 새삼 확인했다. 얼음팩이라도 권할까 싶었지만 오히려 그의 감정을 자극할까봐 말을 삼켰다. 석민은 아무 일 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불은 방에 두고 나와." 버논은 조금 망설이다가 웃음으로 답하곤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정리했다. 말끔히 정리한 침대에는 지난 밤을 가득 메웠던 감정들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둘은 여느 날처럼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요즘 들어 야근이 더 잦아져 퇴근한 뒤 밤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기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는 시간은 아침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식탁 위에서는 많은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버논은 어제 석민이 출근한 사이 집에서 본 TV쇼나 뉴스의 내용을 주로 화제로 꺼냈다. 석민은 버논이 하는 이야기에 모두 반응하고 있었지만 대화의 틈새로 줄곧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둘은 비슷하게 식사를 끝냈고, 석민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버논은 옷장에 가서 석민의 와이셔츠를 꺼내 들고 왔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와이셔츠를 석민에게 내밀었다.


  "어제 내가 미리 다려놨어."


  와이셔츠를 받아 든 석민의 표정은 고마움보단 당혹스러움에 가까웠다. 정성껏 다린 것이 분명한 와이셔츠는 실수로 구긴 구석 하나 없이 완벽했다. 석민은 잠시 상기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곧 버논에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그 짧은 공백이 신경 쓰였지만 버논은 다른 비슷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은 엇갈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현관문에서 신발을 신는 석민에게 버논은 고정적인 질문을 했다. "오늘은 몇 시에 와?" 석민은 대충 시간을 헤아린 뒤 답했다. "8시쯤? 퇴근하기 전에 연락할게." 현관을 나서기 전에 의례적인 입맞춤을 나눴다.


  "잘 다녀와."


  배웅하는 버논의 모습을 석민은 꼭 눈에 담으려는 듯 지긋이 응시했다.


  "응. 다녀올게, 한솔아."


  석민이 출근해서 일상을 보내듯이 버논도 집에서 자신 만의 시간을 지냈다. 먼저 아침을 먹고 난 식기들을 씻은 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거실 한 켠에 놓인 스피커에서는 석민과 한솔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이 자동으로 청소 시간에 맞춰 흘러나왔다. 버논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청소했다. 이제는 몸에 익었는지 매일 하는 청소를 예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었다.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서재의 수많은 책들이 떠올랐다. 적어도 버논이 온 뒤로 한 번도 꼼꼼히 청소한 적이 없는 곳이었다. 버논은 청소도구를 챙겨 들고 서재에 들어갔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의 선반 하나하나를 먼지털이로 털고 걸레로 닦아냈다. 수 개의 선반을 깨끗이 닦아내다 어느 선반 앞앞에 멈춰 섰다. 버논을 멈추게 한 것은 책 측면에 적힌 익숙한 이름이었다. 최한솔. 조심스럽게 꺼내 들어 편 책에는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얼굴은 선명하지 않지만 실루엣으로 미루어 보아 석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찍힌 사진도 여럿이었다. 갈대밭 속에 서서 양 팔을 활짝 벌린 채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 석민의 사진 속 모습을 쓸어 내리면서, 버논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 바닷가 모래사장에 딛고 선 다리, 지는 해를 등진 채 약간 굽어 있는 마른 등,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사진에 찍힌 사람은 모두 석민이었다. 사진을 찍던 그 모든 순간들을, 버논은 '기억'했다. 사진집을 덮었다. 그러자 기억들은 책 속에 갇힌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서재 청소를 끝내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버논은 점심식사를 챙겨 먹는 대신 석민과 함께 할 저녁식사 식단을 고민했다. 인터넷에 접속해 몇 가지 레시피를 검색하고, 정했다. 레시피에 맞춰 온라인 식료품점에서 재료를 주문하고 결제까지 마쳤다. 배달 시간은 16:00으로 설정했다. 그 시간까지 남은 3시간 중 1시간은 TV를 보면서 빨래를 하고 세탁물을 정리하는 데 보냈다. 정확히 2시간이 남았다. 버논은 시계를 확인한 후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앞에 서서 우선 옷을 벗고, 벗은 옷들을 고이 접어 문 옆에 두었다. 욕실에 들어선 다음에는 욕조에 물을 받기 위해 수챗구멍을 막고, 온도를 설정해 적절한 온도의 물이 채워지도록 수도꼭지를 열어 놓았다. 그리고 캐비넷에서 뒷면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힌 입욕제를 꺼내 적당히 욕조에 풀어 넣었다. 욕조에는 곧 탁한 빛을 내는 물이 가득 찼다. 버논은 욕조 안에 오른발, 왼발 순서대로 디뎌 들어선 뒤 천천히 몸을 뉘였다. 턱 아래로 온몸이 빠짐없이 물에 잠겼다. 버논은 음악도 틀어놓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목욕을 했다. 정확히 2시간 후, 그는 욕조에서 나와 수챗구멍을 열어 물을 빼 버리고 간단한 샤워로 몸을 씻어낸 다음 문밖에 둔 옷을 다시 입었다. 이를 하나의 의식이라고 봐도 좋았다.


  16시 05분에 현관문을 열자 배달 온 식재료들이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부엌으로 가져 가 열고, 당장 요리 할 재료들과 보관할 재료들을 가려내 제자리에 놓았다. 슬슬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버논은 습관적으로 TV를 틀었다. 이 시간대에는 늘 그가 즐겨 보는 우주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방영되었다. 벌써 반 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난, 심지어 과학적 사실을 다루는 시리즈인데도 세월의 흐름을 무시하는마냥 방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라기보다 어떤 문학 작품을 감상하길 요구하는 듯한 태도였다. 사실 버논은 그래서 이 시리즈가 좋았다. 제때를 잊은 구시대적인 과학 다큐멘터리라니, 어딘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요리를 하는 틈틈이 TV를 보다가 때로는 핸드믹서를 끄는 것도 잊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정도였다.


  18시 00분이 되어갈 쯤 석민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일찍 퇴근하게 됐어. 이제 회사에서 출발해.' 석민이 회사에서 집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43분. 버논은 느긋하게 준비하던 저녁식사를 마무리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8시 30분이 조금 넘어서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도어락의 첫 번째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릴 때부터 현관 앞에 나가 섰고, 석민이 들어오자 밝은 미소로 반겼다. "다녀왔어?" 피곤한 얼굴을 한 석민은 버논의 인사에, 아침에 배웅을 할 때와 같이 찰나의 주저를 머금곤 그의 볼에 입맞추었다. "응, 한솔아."


  간만에 함께 하는 저녁식사였다. 버논은 자신이 만든 요리들의 레시피와 조리했던 과정에 대해 짧은 설명을 덧붙이면서 석민의 입맛을 돋우려 애썼다. 그런 버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결국 밥을 반 정도 남기고 말았다. 석민은 밥을 남겨 미안하다고 말했고 버논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실이었다. 버논이 저녁을 정리하는 사이 석민은 집에 들어올 때 한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들고 와 그에게 내밀었다. "선물이야." 선물의 정체는 최신 모델의 카메라였다. "고마워." 버논은 과장되게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석민은 별다른 말을 않고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고개는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눈동자의 초점은 모니터 속 인물들의 바쁜 움직임과는 달리 동세(動勢)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버논은 만지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석민을 향해 렌즈 초점을 맞췄다. 셔터를 누르는 감각은 익숙한 동시에 생소했다. 석민은 셔터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같은 자세에서 몸을 더 웅크리기만 했다.


  자기 전 버논은 집안의 복도에 걸려 있는 코르크 보드 앞에 섰다. 코르크 보드에는 석민과 한솔이 함께 한 추억들이 사진으로 물화되어 전시돼있었다. 사진들을 찬찬히 훑으며, 버논은 방금 전 석민에게 받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걸 자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석민에게서 받은 카메라를 보드 앞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침대에 먼저 누운 버논은 석민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석민이 곧 들어와 옆자리에 눕는 소리가 들렸다. 버논은 몸을 틀어 석민과 또 한 번의 입맞춤과 인사를 나눴다. "잘 자." 조도가 찬찬히 낮아졌고 침실을 비롯해 집안은 어둠에 잠겼다. 그렇게 마지막 일과를 마치고 패턴의 일관성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異常)이 일어난 것은 시계가 02:14의 숫자를 나타냈을 때였다. 버논은 오늘도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석민의 울음 소리가 아닌 직접 깨우는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갑작스런 기상에도 정신은 맑았지만 눈앞에 복잡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석민의 용건을 단박에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버논이 묻기 전에 석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서재에 들어갔어?"

  "응, 청소하러 매일 들어가는데?"


  버논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책장, 평소엔 청소 안 하잖아."

  "응."

  "오늘은 했지?"

  "응."

  "책, 봤어?"


  버논의 입술이 자동반사적인 반응을 보이려 잠시 열렸다가, 이내 다물렸다. 그는 석민이 지칭하는 책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대답을 고르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응."


  대답을 들은 석민은 아까보다 더 깊게 패인 미간으로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다음 질문은 무엇으로 해야 할지 스스로도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기색이었다. 석민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 뜯으며 말이 없자 버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잡아 내려 오랜 버릇을 말리려 했다. "만지지 마!" 전례 없는 신경질적인 반응에 버논도, 석민도 놀랐다. 석민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며 눈물과 격정을 한숨에 내뱉었다. "미안,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석민을 버논은 예의 새벽 때처럼 끌어 안았다. 석민의 눈물이 버논의 목덜미에 금세 젖어 들었다.


  "미안, 봐도 되는 물건인 줄 알았어."

  "아니야, 괜찮아. 언젠가는, 언젠가는 보게 됐을 거니까."


  석민은 다른 때보다 빨리 울음을 그치고 평정을 되찾았다. 버논은 석민을 달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그와 함께 다시 침대에 누웠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끌어안은 자세를 취했다. 이제 더 이상 밤중에 깨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석민은 저를 다독이는 버논의 손길에 처음으로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오늘은 악몽도 꾸지 않을 것 같다. 잠들려는 순간 버논이 속삭이기 전까지 석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해, 석민아."

  "⋯⋯."

  "사랑해, '내가' 사랑해."


  '내가'라는 한 마디에 석민은 그가 우려하던 상황이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애써 엉성하게 유지하려 했던 현실의 가림막이 결국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허튼 수작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석민은 울면서 버논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버논은 대답하지 않았다.




*




다음날 11시 00분 정각에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통해 "회수하러 왔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석민이 문을 열자 양복을 차려 입은 여성 1명과 건장한 체격에 유니폼을 입은 남성 2명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거실로 안내한 뒤 부엌에서 마실 음료를 내어 왔다. 여성은 두 남성에게 어떤 지시를 내려 침실로 보냈고, 석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녹음기와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매우 익숙해 보였다.


  "회수하는 데 절차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석민씨?"

  "네."

  "먼저 유선 상으로 듣긴 했지만 반품 사유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저희 A.I. 모델 'Vernon-0218'을 반품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버논을 보면, 오히려 한솔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느껴요."


  석민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한솔이를 대신하기 위해서 버논을 데려온 건데, 그래서 버논을 한솔이로 봐야 하는데 도저히 그게 안돼요. 한솔이가 했던 행동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볼 때마다 버논은 한솔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고 내가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껴요. 매일. 그러면서도 정말 한솔이처럼, 너무 자상하고 내가 사랑했던 모습들을 갖고 있어서 혼란스러웠어요. 한솔이가 찍었던 사진들이나 일기, SNS, 편지, 모든 걸 학습시켜야 한솔이를 더 닮고, 한솔이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솔이의 사진집만은 보여줄 수가 없었어요. 그걸 보여주면, 버논이 진짜 한솔이에 가까워지면서 이상하게 한솔이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았어요.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국 어제 버논이 한솔이의 것이 아닌 자기 감정을 말했으니까 제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됐고요. 너무 무서웠어요. 한솔이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고 싶은데, 버논과 지낼수록 내가 한솔이를 잊어버릴까봐.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제 더 이상 없는데, 아직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나를 속여 왔어요. 그래서 스위치를 꺼버렸어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석민은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울어도 달래줄 이는 더는 없다. 석민은 그 새로운 의지를 표명하듯 컵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모든 회수 절차가 끝나면, 석민씨는 같은 모델이나 혹은 유사한 목적으로 다른 A.I. 모델을 구매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네."

  "알겠습니다. 'Vernon-0218' 모델의 기능에 관한 세부적인 리뷰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부탁드릴게요."


  그 뒤로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더 오가고, 대화를 마치자 시간에 알맞게 두 남성이 침실에서 커다란, 높이가 가슴팍까지 오는 상자를 들고 나왔다. 여성은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녹음기와 서류를 다시 가방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민은 그들과 함께 현관 앞에 섰다.


  "더 하실 말씀이나, 필요한 사항이 있으신가요?"


  여성의 마지막 질문에 석민은 두고 간 물건이 없는지 살피듯 집안을 훑어보았고, 그 시선에 코르크 보드 앞에 놓여 있는 카메라가 걸렸다. 어제 저녁 석민이 버논에게 선물한 카메라였다. 그는 짧은 순간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버논을 본사로 회수한 뒤 몇몇 검토를 거쳐 절차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2명의 남성과 그리고 거대한 상자와 함께 돌아갔다. 현관문이 닫혔다. 석민은 거실로 돌아가는 길에 버논에게 선물했던 카메라를 들어 매만졌다. 카메라를 작동시키자 갤러리에는 단 한 장의 사진, TV 모니터를 응시하는 석민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석민은 그 사진을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끄고 본체에서 메모리칩을 꺼냈다.


  며칠 뒤 석민의 코르크 보드에는 한 장의 새로운 사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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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드라마 <Black Mirror>의 시즌2 에피소드1 "Be Right Back"의 설정을 일부 차용했습니다.

**위의 영상을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을 덧붙입니다. 드라마의 설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글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사람과 똑같이 생긴 맞춤형 A.I.가 있습니다. 이 A.I.는 외모를 조정할 수도 있고 닮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담긴 온오프라인 상의 모든 자료들을 기반으로 그 사람의 사고방식까지 습득 가능합니다. A.I.는 자신이 학습한 것을 토대로 행동하지만 그가 하는 행동이나 갖는 감정은 실제 사람의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충전을 위해 반드시 하루에 2시간, 특수 화학약품에 몸을 담가야 하며, 활동 반경은 A.I.의 주인이 주위에 있어야 하거나 활성화된 장소에서 500m 이내인 곳으로 제한적입니다. A.I.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할 수 있으나 음식 섭취와 같은 생리적 활동은 불가결하지 않으며, 노동과 같은 사회생활에 제한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