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요즘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다섯 단계로 설정해놓은 알람을 못 듣고 삼십 분이나 늦게 일어났는데도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정신을 추스리지도 못한 채 출근길에 몸을 실으니 피로가 벌써부터 쌓이기 시작했다. 키가 백 하고도 팔십이 넘는 장신에 덩치까지 더해지면 대중교통을 타야 하는 출근길은 곧 순례길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덩치가 크니 인파를 뚫고 지나가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로, 그는 행여 자신의 작은 움직임이 밀착한 사람에게 폐가 될까 만원 지하철 안에서 몸을 비트는 행동 하나에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최대한 적은 면적을 이용해 다니느라 간신히 회사 앞에 도착한 뒤에 그의 높다란 등은 자연히 굽어 있기 마련이었다.
큰 덩치는 대중교통에서뿐만 아니라 사무실까지 들어가는 데에도 그리 유리하지는 않았다. 로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십오 분이나 늦은 상황이었기에 몸을 잔뜩 숙이고 죄인처럼 들어가려는데, 꼭 지나가는 사람마다 눈치 없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중에는 지각이라며, 굳이 손가락질로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아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다니엘은 자신의 큰 덩치가 싫지 않았다. 출근길에 잠깐 받는 스트레스보다 인생 전반에서 얻는 이득이 더 많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에서 큰 몸집은 대체로 유리했고, 남녀를 불문한 상대에게서 평균 이상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쉽게 타고날 수 없는 신체적 이점을 다니엘은 기꺼이 여겨 왔었다. 입사 오리엔테이션 때 지금의 상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올라갈수록 다니엘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비나 눈이나, 뭐라도 좋으니 어떤 재해가 일어나서 상사가 제발 사무실에 없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도 사무실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 앞에서 주눅 들거나 그런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상사 앞에서 다니엘은 한없이 작아졌다.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가. 다시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입사 오리엔테이션에서 둘은 2인 3각 참가 페어로 짝지어졌었다. 먼저 나온 지금의 상사에게 맞는 짝을 찾아주겠다며 남들보다 정수리가 한 층 더 잘 보이는 다니엘을 지목한 일일 오리엔테이션 강사 때문이었다. 그의 안목대로 둘의 키는 엇비슷했다. 다만 생각보다 체격 차이가 있었고, 그 때문에 열심히 걸어돌아오는 중 느슨해진 밧줄이 풀리면서 상사 혼자 앞으로 고꾸라졌다. 좌중은 자지러지게 웃어댔지만 상사는 엎어져서 빨개진 코를 하고 다니엘을 노려보았고, 다니엘은 그날 내내 그를 쫓아다니며 사죄를 해야 했다. 그렇게 한 순간의 인연이길 바랬건만, 업무를 시작하는 날 다니엘은 옹성우의 팀에 배정되었고,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노려보는 낯익은 눈빛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이다.
제발 자리에 없기를. 땡, 하고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리자 다니엘은 주문을 외며 꼭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제 소원이 이뤄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어? 다니엘 씨."
놀라서 굳은 다니엘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성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려야 하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일 층 버튼을 누르면서 성우가 물었다.
"커피 사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아, 이미 어쩔 수 없네." 웃음기를 머금은 성우의 말에 안 좋은 예감이 척추를 타고 쭈뼛 올라왔다. 다니엘은 열없이 뒷목을 긁으며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성우가 다니엘에게 어떤 악의를 갖고 괴롭힐 목적으로 그를 대한 적은 없었다. 그 사실을 다니엘도 잘 알았다. 단지 첫 만남에 지고 있던 마음의 빚 때문일까, 다니엘은 괜스레 성우를 대하는 게 불편했다. 실제로 성우는 팀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팀원들에게 맞춰줄 줄 알고 필요 이상의 참견을 안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구 싫다는 소리를 한 걸 본 적이 없을 만큼 싫은 것도 없이 사람이 좋다고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다니엘의 생각은 여기서 다른 팀원들과 달랐다. 그가 호의에 공평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를 하지만 사람인 이상 불호(不好)라는 게 없을 수는 없었다. 그 정도가 적의나 싫어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다니엘은 묘하게 성우가 자신과 다른 팀원들을 다르게 대한다고 느꼈는데, 문제는 심증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만한 정황 증거 같은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느낀 대로 단순히 열거한다 해도 그 사례들이 한없이 사소해서, '기분 탓'이란 걸로 치부해버리면 그뿐이 되었다. 예를 들면 업무에서 자신에게 좀 더 각박하게 군다거나(동기인 K는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고 무난하게 통과했으나 다니엘은 성우에게 직접 다섯 번 이상의 수정 지시를 받았다), 수면부족 탓에 오 분, 십 분씩 지각하는 걸 꼭 짚고 넘어간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다니엘은 회사생활에 있어서 아직 스스로가 미숙하기에 타인에 의해 규제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그 타인이 성우인 것이 껄끄러웠다.
"카라멜 마키아또랑요, 다니엘 씨는 뭐 마셔요?"
"아뇨, 전 괜찮습니다."
"안 마시겠다구요?"
"아뇨, 제가 사서 마실게요."
"에이, 당연히 내가 사야지 무슨 소리예요. 뭐 마실 거예요?"
"저 진짜 괜찮은데⋯."
"자꾸 그럴 거면 그냥 저기 가서 앉아 있어요."
빚지기는 싫은데, 카운터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싫은 다니엘은 결국 원하는 메뉴를 말하지도 못한 채 자리에 가서 앉아 성우를 기다렸다. 성우는 아마도 다른 팀원들의 주문까지 하고 오는 모양인지 시간이 조금 걸린 뒤에야 다니엘이 앉은 자리로 와서 앉았다. 성우가 자리로 오자 다니엘은 본능적으로 오감의 신경을 세우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성우가 피식 하고 웃었다.
"다니엘 씨 긴장했어요?"
"네? 아, 아뇨."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뒤로 기울었어요? 지각한 것 때문에 그래요?"
다니엘의 몸이 약간 더 뒤로 물러났다가, 금세 다시 앞으로 나왔다. 그 선명한 호승심에 성우가 이번엔 소리내어 웃었다. 다니엘의 미간이 얕게 패였다.
"알았어요, 뭐라고 안 할게요."
"⋯⋯."
이미 뭐라고 하셨는데요. 다니엘은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성우의 반응을 보니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웃는 그 얼굴이 얄미워서 바 쪽을 바라보며 언제 음료가 나올지, 그것만 기다렸다. 음료가 다 나오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도 다니엘에게는 그 시간이 영겁 같았다. 진동벨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픽업 바로 향하자 그 뒤를 여유 있게 성우가 따라왔다. 팀원 중 누구에게 어떤 음료를 줄 지 가늠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우의 마른 손이 불쑥 끼어들어 다른 음료보다 사이즈가 불쑥 큰 아메리카노를 집어 다니엘에게 내밀었다.
"뭐 마시는지 몰라서 잠 깨라고 큰 걸로 시켰어요. 아메리카노 마시죠?"
"어, 네."
"이거랑 이것만 들고 와요. 나머진 내가 들게요."
성우는 본인의 카라멜 마키아또와 함께 음료 네 잔을 캐리어에 담아 들고 먼저 성큼성큼 앞섰다. 다니엘이 픽업 바 앞에 멍하니 서 있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부른다. "더 이상 지각은 안 돼요, 다니엘 씨." 짓궂은 건지 호의인지 알 수 없다. 다니엘의 혼란만 더 깊어졌다.
「하비덴트 나한테 커피사줌」
팀에서 하나 뿐인 신입이자 막내인 다니엘에게 유일한 말동무라고는 랜선 너머의 절친한 대학 동기 재환 밖에 없었다. 성우에 대한 한탄은 물론 회사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 모두를 재환에게 털어놓기에 가끔 다니엘이 도통 못 알아들을 말을 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비덴트'가 무엇인지 몰라도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원래 팀장이 사주고 그런거 아님?」
「얻어먹기 싫다」
「하여간 존나 유난」
「싫은건 싫은거다」
「내가 봤을때 넌 싫은게 아니라 좋은데 괜히 유난떠는거야」
「아이라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거랑 싫어하는거도 구분 못하는 바보가」
「혹시 디나이얼이라고 들어봤냐」
「우리재환이 요즘 뜸했지 이따 만나서 맞을까?」
「넌 맨날 너 좋다는 애랑만 사겨서 이런거 잘 모르니까 내가 조언해주는거야 임마」
「모쏠한테 연애조언 듣고싶지않다」
「야내가모쏠이어도짝사랑은박사거든?」
「미안하다 재환아 갑자기 슬퍼지네」
슬프긴 왜 슬퍼? 나 동정하냐? 동정 따위 필요 없어! 그리고 이모티콘까지 이어진 메세지 세례에 다니엘은 가만히 채팅창을 내렸다. 짝사랑과 디나이얼, 두 단어 모두 다니엘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사춘기 무렵부터 바이라는 자각도 있었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은 만큼 제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적 또한 없었다. 좋아한 상대보다 좋아해준 상대와 만났던 적이 많다는 재환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지만 만났던 사람 모두에게 충실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짝사랑이라는 소위 말하는 절절한 감정에 시달려 본 적 있냐고 묻는다면, 다니엘은 그 경험을 정확히 떠올리지 못했다.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면 아주 어린 시절 만났던 상대의 한 마디였다. '너랑 사귀고 있는데도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그건 정말 어릴 때의, 철 모르던 고등학생 때의 이야기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도 종종 그 때의 한 마디가 떠오르고 지금까지 연애의 금칙어가 된 걸 보면 제법 충격이긴 했다.
재환의 말에 새삼스럽게 스스로를 돌아본 다니엘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성우에 대한 제 감정을 살펴보았다. 좋아하는 감정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둔하진 않다. 이건 어려운 상대에게 정말 순수하게 껄끄럽고 불편한 것뿐이다. 그가 어려운 건 초면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그리고 자신에게만 유달리 대하는 것 같은 그의 행동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정말이지 맹세코.
"다니엘 씨."
재환과의 채팅창을 다시 열려던 다니엘의 오른손 검지가 놀라서 구부러졌다. 숨을 헉 하고 들이키고 돌아본 뒤에는 소리 없이 다가온 성우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화제의 대상이던 사람을 갑자기 마주하려니 딸꾹질마저 나올 것 같아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아까 부탁했던 자료 오늘까지 마무리해줘요."
"네? 그거 내일 오후까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내일 회의가 앞당겨져서 아침까지 필요하게 됐어요."
"아, 그럼 전 이따 야근⋯."
"이따 팀 회식 있잖아요. 오늘 야근 금진데."
"⋯⋯."
"깜빡했구나?"
"⋯⋯."
"집에도 연락 해놔요."
"네?"
"집에 기다리는 사람 있지 않아요? 보니까 매번 집에 일찍 가던데."
아님 말구요, 성우는 어깨를 으쓱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버렸다. 바람 같은 그의 방문에 다니엘은 잠시 벙쪄있다가 다시 뒤돌아 깜빡거리는 채팅창을 켰다. 그의 손가락에는 전의(戰意) 같은 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쌍방불호다 이건 백퍼확실」
다니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제가 재환의 말처럼 좋아하는 감정과 아닌 감정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퇴근하기 직전에 다니엘이 필요한 자료를 겨우 성우에게 제출할 때까지도 성우는 업무를 하느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마워요, 일단 두고 가요." 그 말에 다니엘은 쓸데없이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근데 회의 내일 아침인데 시간 괜찮으세요?" 성우는 여전히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봐야죠, 뭐." 정말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다니엘은 성우의 지독한 일 중독에 돌아서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빨간 줄을 하나 더 그었다. 세상에 중독될 것이 없어서 일에 중독되나, 다니엘의 생각은 그랬다. 하루치 업무를 끝내면 칼 같이 퇴근하는 다니엘과 달리 성우는 항상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늦게까지 야근을 한 적이 드물어 성우가 보통 몇 시에 퇴근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팀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자정까진 남아 있는 듯 했다. 그러고도 아침에 늘 다니엘보다 일찍 출근을 했다. 어지간히 재미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 분명하다고 어림짐작해본다. 지루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과는 도통 안 맞는다고, 나중에 재환에게 얘기할 근거 하나를 기억해놓았다.
회식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어찌 일을 끝내고 온 다니엘도 퇴근 직전까지 전력을 다해 다소 피곤했지만 성우와 같은 자리에 앉지 않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오히려 제 자리에서 더 열심히 입담을 펼쳤다. 그래봤자 열댓 명 남짓 되는 팀원에, 떨어진 자리라고 해도 옆자리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잘 들렸다. 성우가 앉은 테이블의 화제가 마침 연애에 초점이 맞춰졌을 때에는 모두가 그 얘기에 주목했다. 그러다 질문의 방향이 성우에게로 향했다.
"팀장님, 좋아하는 사람 있으세요?"
그에게 애인이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질문은 곧장 다음 단계에서 시작했다. 다니엘은 그 대화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으나 모두의 이목이 성우에게 향해 있어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면적 만을 그에게로 향했다.
"⋯없습니다."
성우가 대답을 머금은 것은 단 2초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 이상의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곧바로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어디의 누구인지부터 시작해서 온갖 추측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완전 헛다리 아냐, 지나치게 열성적인 사람들의 반응에 진저리가 나려고 할 때 다니엘이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은 저보다 나이 많아요."
그 옆의 누군가가 "역시 팀장님 연상 취향." 이라고 말했지만 다니엘은 방금 전의 발화자가 성우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가 "설마 팀장님, 우리 회사예요?" 재차 물었을 때에서야 그 호칭이 어색하다고 느꼈고, 성우가 "저희 회사 아니에요." 하고 웃으면서 답하자 위화감을 깨닫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아까 그 시시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게 옹성우 팀장이라고? 다니엘은 믿을 수 없어 저도 모르게 눈두덩을 문질렀다. 어두운 조명 아래이긴 하지만 그의 귀가 조금 붉어진 것까지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 사람'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법 술술 불기 시작하는데, 다니엘은 아무래도 지금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 대답하고 있는 사람이 제가 알고 있는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그가 아무리 자신에게 냉정하게 대하거나 일에 매몰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사람일 것이므로, 감정이 있고 그것을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좀처럼 타인에 대한 특별한 호의와 성우를 연결시키지 못했다. 이건 단순히 편견의 작용일 뿐이다. 그를 특이하다고 생각할수록 더 자주 연상할 것이고, 그건 다니엘이 절대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다니엘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회식자리는 물 흐르듯이 흘러가 어느새 성우의 이야기도 흘러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우가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몇몇이 자리에서 함께 일어났다. 다니엘도 이때다 싶어 같이 일어나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냐는 성우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 정답인 그 절반 때문이었다. 인사를 하느라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게 나온 다니엘은 익숙한 뒤통수가 멀찍이 앞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 앞이 지하철 역이니 어쩔 수 없이 방향이 같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큰 덩치 만큼 큰 보폭을 부러 줄여가며 성우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도록 주의했다. 블럭 하나를 두고 역에 다 와갈 때쯤 성우가 방향을 꺾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성우가 사라지자 다니엘은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고, 그러다 이 골목이 그에게 낯익은 곳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종종 게이 친구들을 만나러 오는 게이바들이 밀집한 골목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성우와 같은 지점에서 방향을 꺾어 그를 미행하는 모양새가 됐다. 다시 자그마한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통수는 골목 안쪽의 한 가게 앞에서 익숙하게 누군가와 인사를 한 뒤 다시 사라져버렸다.
다니엘은 곧장 몸을 돌려, 아까 들어왔던 방향과 정반대로 걸어 원래 목적지였던 지하철 역으로 직행했다. 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 열차에서 내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집앞에 도착해 있었는데, 집까지 온 길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보통의 걸음으로 걸어왔는데도 뛰어온 것마냥 숨이 가빴다. 도어락을 누르는데, 얼이 빠진 것처럼 몇 번을 실패했다가 몸의 기억에 의존해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니엘의 수면부족의 원인이 그에게로 돌진했다.
"루피, 형아 많이 기다렸나?"
오랫동안 그를 기다린 모양인지 진회색의 고양이는 다니엘이 현관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의 바짓자락에 부벼댔다. "잠깐, 형아 손 좀 씻자." 하고 달래는데도 루피는 울면서 화장실까지 다니엘을 따라 들어왔다. 그가 간신히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와 깃털로 된 장난감을 흔들 때까지 루피는 쉼 없이 다니엘을 보챘다. 평소 같았으면 다니엘도 그 성화에 열렬하게 보답해줬을 텐데 오늘은 좀처럼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는 장난감을 내려놓고 독촉의 눈길을 보내는 루피를 껴안아 침대 위로 엎어졌다. 냉큼 품에서 빠져 나온 루피가 다니엘의 등을 밟고 올라가 그루밍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면 매일 이런 식이기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회사에 가 있는 동안 못 놀아준 만큼 집에 오면 늦게까지 놀아줘야하고, 새벽에는 뜬금없이 간식을 달라며 알람시계처럼 울어대는 바람에 편히 잘 수가 없다. 그래도 다니엘에게는 루피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는데, 지금 머릿속은 단 한 가지 생각을 좇기 급급했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확률 백오십 프로를 자랑하던 게이다도 성능이 다 죽어버린 모양이다. 성우를 한 번도 연애감정과 연결 지어 생각해본 적 없어서, 혹은 연결 짓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온 지 십 년도 더 된 반전 영화의 결말을 이제야 혼자 알게 된 기분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성우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귀끝을 붉힐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공평무사한 사람의 특별한 호의를 받는 기분이란 어떤 것일지, 다니엘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루피야, 형이 오늘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 것 같다."
그의 수면부족은 내일도, 조금 다른 이유에서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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