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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디

[황청] 여전히 아름답다



손톱만 스쳐도 무너져 내릴 모래성의 종말을 알고 있는 이의 심정은 어떠한가. 또한 그 손가락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면.
  
아오미네 다이키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서툰 아이였고 키세 료타는 그의 아빠 다리 안에 갇힌 마른 모래성이었다. 아오미네가 모래성을 만든 것은 처음이었기에 단단한 모래성을 만들려면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아오미네가 만든 모래성은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르고 바삭거리기만 했다. 간신히 쌓아올리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너뜨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제 손으로 끝을 냈다. 아오미네가 굳이 건들지 않아도 쉽게 무너질 모래성이었지만 굳이 그랬다. 모래성은 흩어져, 모래로 되돌아갔다.

  
1년 남짓을 이어온 아오미네와 키세의 연애는 그렇게 쉽게 끝이 났다. 그러나 처음과 끝이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모래성은 무너졌지만 둔덕이 되어 잔적을 남겼다. 담담히 이별의 말을 뱉은 장본인은 처음 사귈 때만큼 키세에게 무심하지 못 했다. 그래서 헤어진 지 두 달 만에 다시 연락을 했다. 전화번호를 바꾸었지만, 키세가 발신번호를 확인하기도 전에 몸을 흠칫 떨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수신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형편없는 그 몰골이 그려졌다.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반응에 아오미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더랬다. 키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오미넷…치? 거기에 아오미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나야. 잘 지냈냐? 뻔히 알면서 부러 묻는 질문에 억겁 같은 찰나가 스쳤다. 간신히 네- 라고 대답하는 주제에 짧은 대답에도 음의 높낮이가 제멋대로였다. 아오미넷치는요…? 하고 겨우 덧붙여 묻는다. 아오미네는 아까처럼 잘 지내노라고 답했다. 키세의 속이 문드러져가는 소리가 휴대폰을 댄 귓가에 왕왕 울렸다. 그 잡음이 듣기 싫어 아오미네는 그대로 본론을 꺼내버렸다.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되냐? 만나자.

  
아오미네는 원체 남한테 관심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나였고 나머지는 태양 주위를 맴도는 행성처럼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행성들 중 하나가 자신을 향해 곤두박질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갑자기 찾아와서 심란한 표정으로 고백하며 사귀어달라는 키세에게 그 자리에서 그래, 라고 대답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귀고 나서 처음 두어 달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열 달의 시간이 더 지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에 와서는 눈은커녕 얼굴을 보지 않아도 키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헤어지고 나서 두 달 뒤 얼굴 좀 보자는 말에 키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는 것은 눈 감고 드리블 하는 것보다 쉬웠다.

  
약속은 오늘, 수요일 저녁으로 잡혔다. 아무래도 주말은 너무 멀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끊을 때쯤 키세가 약속을 좀 당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다급하게 물었었다. 촬영 스케줄이 있을까봐 부러 주말로 물은 것이었는데, 하긴 최근엔 활동을 거의 안 한다는 기사를 얼핏 봤던 것 같다. 그 이유가 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한 대 때려야지. 농구화를 신는 오른발에 아오미네는 작은 결심을 우겨넣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은 제법 사람들로 북적였다. 약속 장소는 자주 만나곤 했던, 키세의 집과 아오미네의 집의 중간지점에서 아오미네 쪽에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졸업하고 모델 일 때문에 다시 도쿄로 돌아온 키세의 집은 아오미네의 집과 지하철로 5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관계를 한 번 정리하고 난 후 키세와의 사이에 대해 정의 내린 아오미네의 생각과 같았다. 글쎄, 매일 키세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받고 몸을 섞고 난 뒤엔 두런두런 얘기까지 나눈 사이치곤 냉정한 대답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거리감의 원인이 키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키세의 머리 뚜껑을 열면 실제 뇌 주름보다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을 털이 일어난 실타래가 있을 것이다. 머리와 꼬리가 한 데 묶인 채 제일 안속에 처박혀 영영 풀 수 없는 실타래가. 키세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았다. 제 딴엔 포커페이스랍시고 항상 웃음을 만면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 자체로 거짓인 본성을 숨기진 못 했다. 아오미네는 키세와 아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키세의 그런 성질을 직감하고 있었다. 웃을 수 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까 저런 어색한 미소를 짓는 거겠지.

  
사실 아오미네는 농구를 썩 잘 하는 것 외에 키세에게 별 볼일이 없었다. 다른 인격적인 부분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오미네의 삶은 농구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타인을 보는 기준도 농구였다. 그러나 늘 외치던 ‘날 이길 수 있는 건 나뿐이야’가 깨지고, 키세가 더 이상 타인이 아니게 된 후에는 대부분의 연인이 그러하듯 자연히 키세의 반절이 곧 제 것이 되었다. 이제껏 신경 쓰지 않았던 키세의 다른 특징들이 제 일 마냥 커다랗게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자신을 향한 그의 밝음이 실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울대에서 삼켜진 말들과 수없이 지새운 밤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아오미넷치, 같이 놀러가지 않을래요? 아오미네가 귀찮아, 라는 대답으로 쉽게 거절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를 꺼내기 위해 키세는 이마에 열이 오를 정도로 끙끙댄다는 사실을 말이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대책 없이 밝은 모습과 농구로 자신을 이기고 싶어 하는 투지를 키세의 전부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소극적인 망설임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원래 이런 놈이었나? 머뭇거리는 간극들이 순전히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생겨난 거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지극히 좋아하는 감정은 말을 고르고, 또 고르게 만들고 솔직한 행동보다는 상처 입지 않을 안전 범위의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키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다가가려던 아오미네는 그 진심이 만들어낸 척력에 밀려나고 말았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만큼 조심해질 수도 있지. 처음엔 좋게만 생각했지만 반복된 절절한 사양에 아오미네도 질려버렸다. 다가가려고 할수록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키세를 두른 보이지 않는 막에 점점 짜증이 났다. 그래서 헤어졌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헤어지자는 말이 키세에게 어떤 파급력을 갖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야만 했었다.

  
아오미네는 인적이 드문 공원 입구에서 발을 멈추었다. 약속 장소인 농구 코트가 코앞이었다. 잠시 서서 호흡을 골랐다. 긴장한 것도, 간만에 볼 얼굴에 설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몇 발자국 걸어 나가지 않아도 키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서 있을지 선명히 그려졌다. 어떤 장황한 말로 묘사되어도 ‘한심한’이라는 단어 바깥으로 벗어나지는 못 할 것이다. 헤어지자, 그리고 다시 만나자. 일방적인 관계의 맺고 끊음을 요구하면서 키세의 반응이 철저히 예상되었지만 예상한 것이 들어맞았다고 해서 아오미네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물리적인 부재의 기간 동안 무언가 깨우치기를 바랐다. 내가 없으면 뭐가 잘못 되었는지, 왜 잘못 되었는지 알려고 들지 않을까. 아오미네는 키세의 한심한 몰골 속에 바라던 깨달음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아오미넷치-”

  
목덜미에 덥수룩한 온기와 잠긴 음성이 덮쳐왔다. 갑작스런 무게감에 너무 놀라 아오미네는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겨우 느릿하게 뇌가 움직인 후에야 등 뒤에서 껴안는 덩치의 정체를 인지했다. 한숨을 쉬며 내려다 본 키세의 팔이 껴안는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
  
“연락, 하고 싶었는데 하면 화 낼까봐- 매일 전화기만 쳐다보고, 결국 연락은 못하고, 진짜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구요.”
  
“…….”
  
“그런데 말 잘 들어서 주는 상처럼, 아오미넷치가 먼저 연락해서 저 정말- 윽… 진짜-”
  “…….”
  
“너무- 보고 싶었어요.”

  
두 달 만에 상봉한 키세는 다른 때보다 훨씬 거리낌 없이 제 감정들을 뱉어냈다. 아오미네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몰아쉬는 호흡이 거칠었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격앙된 키세의 숨결에 아무 것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비겁하게 뒤로 다가와서 얼굴도 안 보여주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그치만- 저 지금, 형편없어요….”
  
“…언제는.”
  
“아뇨, 진짜 지금 꼴이-”

  
말이 아니에요, 라고 말하려던 키세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 했다. 느슨한 키세의 팔을 풀고 아오미네가 뒤돌아섰기 때문에. 당황한 키세는 말이 아닌 제 꼴을 다급히 숨기지도 못 했다. 잡지에서 한껏 멋을 낸 사진이나, 적어도 평상시에 아오미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멋지게 꾸미고 나오던 키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달간 자르지도 않고 방치한 머리는 쇄골께까지 내려와 헝클어져 있었고 눈망울은 그 어떤 비극의 여주인공보다 처량한 빛을 띠었으며 얼굴 전체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가 보나, 항상 반짝반짝 빛나던 키세 료타라고 할 수 없었다. 지나가던 팬이 지금의 키세를 본다면 못 알아보거나 마다할 정도의 몰골이었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생각했다. 여전히 아름답다고. 짜증나게 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던 너는 그대로이다. 어떠한 이별의 시간도, 그 시간이 주는 고통도, 네 아름다움을 앗지는 못 했다. 지난 생일날 준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을 짓는 이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키세의 두 손이 뒤늦게 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올라갔다.

  
“으으- 머리라도, 자르려고 했는데…”
  
“키세.”
  
“-네?”
  
“다시 만나자고 하면 너무 뻔뻔하냐?”

  
자그만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란 두 손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갔다. 진자 운동을 하는 추처럼 눈동자가 경련하고 있다. 키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봇물 같은 눈물 대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아오미넷치라도, 때릴 거예요.”

  
이루 말로 다 하지 못할 안도감에 힘이 빠져 아오미네의 어깻죽지에 머리를 기대고 온몸을 맡겨 버린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다. 제발 한 대 쳐, 나도 속 시원히 너 때리게. 아오미네는 진심이었건만 키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기만 했다. 농담 아니라고, 제기랄.
  
키세가 아오미네가 원하는 답을 찾았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키세는 전보다 한결 편히 가슴에 담긴 말들을 여과 없이 말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잔적마저 주는 그 아름다움에, 아오미네는 다시금 견고한 모래성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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