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악의 연인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 내 동정을 가져간 누나, 내 유명세로 연예계에 데뷔한 누나, 깨진 뒤에도 6개월을 날 따라다녔던 스토커 같았던 누나. 죄다 누나네. 이제껏 사귄 횟수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편이긴 하다. 크게 원망도 않는다. 술자리에서 욕을 직함처럼 붙여 안주거리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억하심정만 간직하고 있을 뿐. 그리고 내가 최악으로 뽑은 옛 연인의 수보다 나를 최악으로 뽑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솔직히 대개의 경우 나는 개새끼였다. 겉으로 드러났든 아니든 내가 진심이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일일이 화풀이를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사랑받고, 누군가에게는 미움 받는다. 이건 매우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일반화가 도저히 적용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아오미넷치, 당신은 최악의 세 손가락에도 차마 넣어줄 수 없을 정도로 용서가 안 돼요. 최악에라도 들고 싶었다면 나에게 그렇게 등 돌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아오미넷치는 내가 유일하게 진심이었던 사람이다. 과거형으로 끝낼 수 없는 이유는 손가락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오미넷치를 향한 내 사랑은 한 마디로 지고지순했다. 나는 오로지 그만을 바라봤다. 무미건조한 내 일상에서 타오르는 단 하나의 빛이었기에, 해바라기가 씨앗일 적부터 태양만을 향하듯 그와 마주친 첫 순간부터 내 시선은 오직 그만의 것이었다.
해바라기에게 태양은 유일신이지만 그 명제의 역도 참인 것은 아니었다. 설령 그의 세계에서 내가 유일한 해바라기인들, 가장 크고 아름다운들, 나는 한갓 굽어내려다 볼 생명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오미넷치가 없으면 나는 죽겠지만, 내가 없어도 그는 죽지 않는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나를 아꼈다. 올려다보는 내 목이 부러지기 전에 그가 내 받침대를 지탱해주었고 나는 그것으로 영생을 얻었다고 착각했다. 그게 나의 오만이었다.
“꺼져버려.”
우리가 5년이나 같이 살았던 집을 미련 없이 박차고 나가면서 아오미넷치의 차가운 음성 자락만이 현관에 남았다. 먼지 한 톨까지 가방에 쑤셔 넣고 흔적이라곤 털 끝 하나조차 남기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소파에서 뒹굴던 그의 모습이 환상으로 느껴질 정도로. 나는 갑작스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처 소멸되지 못한 붙박이별처럼 제자리만 지켰다. 아오미넷치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나한테? 얼마 전 촬영했던 드라마의 상대 여배우가 뱉었던 대사가 오버랩 되어 이명 같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아오미넷치와 함께 지냈던 이 집이 차라리 세트장이라고 말해줘. 누군가에게 그렇게 한탄해보았지만 세트장이라고 하기엔 아오미넷치가 떠난 이후 우리 집은 늘 암전이었다. 그의 빈자리가 무서워서 감히 불을 킬 수가 없었다.
억울했다. 줘놓고 생색내는 것이 가장 꼴사나운 일이란 건 알지만 나는 아오미넷치의 앞에서 늘 한심한 꼴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얼마든지 꼬장을 부려도 그의 머릿속에 나를 정의하는 ‘한심한’이라는 단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울컥한 목울대가 얼얼할 정도로 억울했다. 꺼져버리라니. 그 말은 너무 심했다. 나와 함께 했던 날들 중 하루라도 떠올렸더라면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같이 지냈던 나날들은 적어도 밝은 색깔이었다고 자부한다. 오랜 시간 아오미넷치를 향한 나의 일방통행이 결국 쌍방을 만들어냈고 나중에는 아오미넷치도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느꼈으니까. 그건 틀림이 없다. 날 담아내는 아오미넷치의 눈동자마저 착각할 정도로 나는 그를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날 떠났다.
왜?
적막과 어둠 속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지난 일주일간 어떠한 전화가 와도 아오미넷치로부터가 아니란 걸 체득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얄팍한 기대는 더욱 아슬아슬해지기만 할뿐 끊어질 줄을 몰랐다. 형형히 빛나는 액정에 뜬 글자가 새삼 확인사살 시켜주었다. 쿠로콧치였다.
- 키세군.
“…….”
- 키세군, 듣고 있습니까?
쿠로콧치와의 통화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가 먼저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인사를 했을 텐데, 지금은 한 마디 하려 입을 떼는 것조차 어려웠다.
- 저… 우편이 잘못 돼서, 오늘에서야 받게 됐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벅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눌러 담았다. 입술이라도 다물지 않으면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음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뭐라도 지껄여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 알고 있는 쿠로콧치에게 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기에, 결국 나의 기만에 그의 단호한 선고가 내려졌다.
- 결혼 축하합니다, 키세군.
그리고는 온통 짐승 같은 나의 흐느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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