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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디

[솔겸] A Theory of Gravity






최근 전투가 잦다. 덕분에 함선 내의 모든 사람들이 바쁘지만 파일럿들은 제대로 앉아서 쉬지도 못했고, 에이스 파일럿은 두말할 것 없었다. 에테르(Aether) 함선의 에이스 파일럿인 버논-한솔 최(Vernon-Hansol Choi)는 사이렌이 울리자 또 먹던 밥을 팽개치고 콕핏으로 내달렸다. 수트를 입고 있던 상태여서 락커룸에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조차 없었다. 몇 개의 전투기를 또 추락시켰다. 아니, 이곳은 우주 공간이니 폭발시켜 공중에 부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시추에이션 룸(ASSR; All-Source Situation Room)은 이번 전투에서도 버논이 가장 많은 수의 전투기들을 우주의 쓰레기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가 전투기에서 내리자마자 함선 내의 언론이란 언론은 죄다 몰려와 버논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버논 군, 이번 활약도 아주 멋졌는데 에이스가 되는 데 비결이라도 있나요? 에이스, 팬들한테 한 마디만 해줘요! 다음 전투에서도 기록 경신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는 쏟아지는 질문들을 웃음으로 얼버무린 채 간신히 에어필드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엔지니어 룸으로 향했는데, 여전히 수트는 입고 있는 채였다.


  엔지니어 룸의 문이 열리자 진한 기름 냄새가 훅 끼쳤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논은 그제야 아차 하고 깨달았다. 자신이 막 전투에서 돌아왔으니 엔지니어들은 그가 만든 우주의 쓰레기 사이를 누비며 쓸 만한 부품들을 수집하러 나갔을 것이다. 인간이 밥을 먹으면 소화를 하고 배설을 하는 자연법칙과 동일한 프로세스이지만 버논은 번번이 깜빡했다. 그는 사고를 쳐놓고 뒷일은 잊은 어린 아이가 된 이 기분이 싫어 가슴을 옥죄는 답답함이 원흉이라고 합리화했다. 그리고 합리화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아직도 수트를 입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는데, 답답함의 원인 중 하나가 실제로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수트의 물리적 작용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벗으러 가지 않고 그가 찾으러 온 사람의 자리에 가 앉았다. 탈의하러 간 사이 언제 엔지니어들이 귀환해서 다시 사라질지,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버논이 앉은 자리에는 그가 탑승하는 전투기의 설계도가 펼쳐져 있었다. 설계도 곳곳에 수리해야 할 부분이나 버논이 부탁했던 개조 요망 파트가 적혀 있다. 신경 써주고 있구나. 자리의 주인이 에이스 파일럿의 전담 엔지니어 팀 치프이니 신경 쓰는 게 당연하지만 버논은 새삼스레 그의 흔적들이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그를 기다린 게 몇 시간 째였을까, 버논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며칠 째 밤낮-낮과 밤의 기준을 나누는 태양을 고정적으로 갖고 있지 않지만 인류는 아직도 오랜 관습에 따라 24시간제에 따르고 있다-을 가리지 않고 긴급출동에 시달렸으니 육체에 피로가 몰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다잡으려는 의식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곧장 아득히 곤두박질쳤다. 꿈 속의 공간은 꼭 콕핏에서 내다보는 우주의 허공과 닮았다. 까만 무중력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기분에 끔찍한 기시감을 느낀다. 실제와 달리 꿈 속에는 붙들고 있을 패널과 스틱이 없다. 디딜 곳이 필요하고 붙잡을 것이 간절하다. 부유하는 이 기분은 신체의 내부까지 공허로 만든다. 이대로 몸이, 세포 단위로 조각조각 흩어져 우주에 흡수될 것만 같다. 버논은 필사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하며 흡수를 거부한다. 그 저항의 결과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반짝 뜨는 것이다. 눈앞에는 정확히 90도로 기울어진 석민이 있다.


  "나쁜 꿈이라도 꿨어?"


  그의 손이 다가와 버논의 이마에 얇게 맺힌 땀을 훔쳐낸다. 버논은 아직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석민의 존재에 적응하느라 눈을 여러 차례 꿈뻑이기만 했다. 그러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르게 고치려는데, 잠든 동안 양손으로 지나치게 강하게 깍지를 끼고 있어 손가락이 마디마디 붉게 부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무의식의 악력에 스스로도 놀라 열없이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 위로 크고 마른 손이 겹쳐졌다.


  "방에 가서 자지 왜 여기까지 왔어."

  "얼른, 보고 싶어서. 수색 나간단 것도 깜빡했어."

  "그래, 나가서 별로 건질 것도 없더라. 내가 적당히 부수랬잖아."


  석민은 버논의 양손을 놓지 않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책상을 뒤적이며 말했다. 지저분한 책상 어딘가에서 펜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것을 쥐고 펼쳐진 설계도에 새로 몇 가지를 적었다. 버논은 석민의 손가락 끝이 설계도 단면을 스치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마법일까. 과학적이고 과학적인 이 시대에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버논에게 가끔 석민의 손 동작은 어떠한 논리도 적용되지 않는 미지의 현상으로 느껴졌다.


  버논은 석민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 시간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전투에서 돌아온 뒤로부터 대략 서너 시간은 지나 있었다. 그에게는 그 시간이 어설프게 잠들어 있던 시간보다 석민이 무중력을 헤엄친 지난한 시간으로 더욱 다가왔다. 그것은 그의 약점과 관련 있다. 버논은 무중력, 그러니까 더 이상 중력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행성에서 거주할 수 없게 된 현재, 중력 제어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는 호흡곤란마저 올 정도로 무중력의 상태를 두려워했다. 마치 수영 선수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곳은 완전 진공과 무중력이라는 압도적인 환경이 지배하는 곳이며 우리는 생존을 위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손재주를 끌어 모아 숨을 쉬고 발 디디뎌 살아가고 있지만 이는 단 하나의 변수 변화로 틀어질 수 있다. 버논은 밀봉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이 두려웠고,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꼭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그는 석민의 손을 쥔 양손에 힘을 주었다.


  "밖에 나가 있을 땐, 조절이 잘 안 돼."

  "⋯⋯."

  "넌 무섭지 않아?"


  뭐가? 하고 석민은 되묻지 않았다. 출동을 나갔다 돌아온 뒤의 버논은 자주 이런 상태에 빠졌고, 그럴 때 대부분 석민이 곁에 있었다. 어쩌면 버논의 주치의보다 지금 그의 상태를 잘 아는 것은 석민일 것이다. 그래서 아니라는 솔직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석민은 한 번도 두꺼운 철갑 너머 저 바깥의 우주가 두려웠던 적 없었다. 오히려 그는 '우주'라는 공간에 막연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아무리 흙을 밟아본 적 없는 우주 세대(Cosmic Generation)라 할지라도 인류의 생존 본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갖기 어려운 성질이었다. 무중력에서 의지를 갖고 행동하려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중력 제어 장치로 생활을 유지하는 모함에서의 삶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기에, 우주는 그에게 차라리 요람이었다. 그러니 석민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주인(astronaut)인 셈이다. 그를 비롯한 함선의 모든 사람들이 날 때부터 선택의 여지 없이 우주인이었지만 그 삶이 이처럼 숙명처럼 부과된 이는 찾을 수 없었다. 치프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수색대에 자원한 것도 석민의 자의에서였다. 그는 무한한 어둠에서 안식을 느꼈다.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예전엔 그런 말이 있었다잖아."


  사람들이 더 이상 읽지 않는 책의 가장 첫 장에 쓰여진 말이다.


  "그 흙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밖에 있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

  "늘 그런 기분이 들어."


  버논은 석민이 인용한 구절도, 석민이 느끼는 기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 했다. 그것은 또다른 미지였다. 붉은 사이렌이 엔지니어 룸에 울려 퍼졌다. 석민의 손을 놓아야 했지만 사실 그의 손을 놓는 방법 또한 알지 못했다. 버논은 문득, 현생인류가 지상에 살았을 적보다 발전된 문명 속에 살고 있지만 그때보다 무지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번 전투에서 가장 많은 파괴를 성취하리라는, 이제껏 든 적 없던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그의 예감은 정확히 1시간 48분 14초 후에 실현되었다.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어느 이론에의 증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