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민은 굉장히 불쾌한 느낌 속에서 눈을 떴다. 눈앞에 분명히 다른 사람이 누워 있었던 구겨진 시트의 흔적만 남겨진 것을 보고 불쾌 수치는 이미 높은 시작점에서 급격히 상승했다. 이 새끼 또 튀었어. 장본인이 들으면 억울하다고 할 표현이었지만 새벽까지 물고 빨고 하던 사람이 눈뜨기도 전에 사라졌으니, 석민의 입장에선 그보다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이불을 발로 뻥 찼다. 이불은 잘 날아가지도 않고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걸 다시 시트와 함께 그러안고 욕실로 가서 세탁기 안에 우겨 넣어버렸다. 부피가 커서 한 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석민은 한숨을 내쉬어 화를 한 번 삭힌 다음 이불을 먼저 넣고 버튼을 눌렀다. 회전과 함께 시작된 진동 소리에 잠시 가만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 두번 겪는 패턴이 아닌데도 이 울화는 도무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씻고 어서 출근 준비를 할 요량으로 세면대 앞에 섰다. 낯선 칫솔이 제 것과 함께 나란히 컵에 꽂혀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것도 벌써 몇 번째지. 예상가능한 낯선 칫솔의 존재에 석민은 이제 단념하고 그걸 그대로 쓰레기통에 내리 꽂았다. 부엌에 가면 분명 전기 밥솥 안에 김민규가 해놓은 오므라이스가 있을 것이다, 백퍼. 냉장고를 열면 집에 있지도 않은 과일을 어디서 구해왔는지, 잠들면 누가 들쳐 메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드는 석민이 모르게 갈아놓은 과일주스가 있을 것이고, 옷을 갈아 입으려고 옷장 앞에 서면 역시 석민이 고른 기억이 없는 정장이 얌전히 걸려 있을 것이다. 현관문 앞에 '사랑해♥' 따위가 적힌 메모를 붙일 정도로 감성이 충만하진 않으니 그런 건 없을 테고. 석민은 씻는 동안 민규가 저질러 놓았을 모든 만행에 대해 예상을 했고, 현관을 나서고 나니 그 예상은 완벽히 들어 맞아 있었다. 기분은 더욱 안 좋아졌다. 이렇게 완벽한 예상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데이터가 반복되어 쌓인 것인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석민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이번엔 진짜로 말해야 한다. 석민은 휴대폰을 꺼내 통화 화면을 빤히 내려다 보았다. 지금 오픈 준비하느라 바쁘겠지. 메시지를 보내놓을까 하다가 제때 답장하는 것이 민규의 특기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결국 당장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 석민은 울고 싶어졌다.
출근이 우선이다. 석민은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겨 지하철에 올라탔다. 회사에 가면 일이 산더미라 머리를 비우고 싶은데도 머릿속은 고장난 듯 계속 같은 생각을 복기했다. 오늘도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지 못해 손잡이에 머리를 박으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돌이켜 보았으나 석민에겐 그간의 기억이 모두 서로의 잘못과 사건들로 뒤죽박죽이어서 오류의 시발점을 찾기 어려웠다. 누군가 석민에게 민규와 헤어질 당시를 떠올려 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기억이 변명으로 뭉뚱그러진 석민은 극구 부인하고 또 부정할 것이다. 대신 그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민규와 석민은 중학생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연인 사이였고, 석민이 대학생이 되고 민규가 대형 중식당의 주방 막내가 된 뒤부터는 주말 부부 같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석민은 새로운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민규는 매일 주방에서 혼나고 구박 받느라 바빴다. 그래도 둘 중 외로움을 더 많이 느낀 것은 석민이었다. 적어도 석민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때때로, 조모임이나 과제를 하다가 분노를 분출하고 싶을 때, 도서관에서 밤늦게 집에 돌아올 때 등등, 석민은 꽤 자주 민규를 떠올렸고 그에게 연락할 때마다 통화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문자나 메신저는 의미가 없었다. 연락할 때마다 반나절 이상의 시차가 있어 대화의 맥이 툭툭 끊겼다. 민규가 저보다 더 바쁜 걸 뻔히 아는데도 왜 연락이 안 되느냐고 묻는 것이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그렇게 가까스로 1년을 보내고 난 뒤 석민은 입대를 했다. 심지어 민규는 건강 상의 문제로 군복무 면제였다. 민규가 부쩍 는 요리 실력으로 10단 도시락을 싸와 면회를 오기도 했지만 민규는 여전히 바빴고 부대에서 건 통화는 불발되기 일쑤였기에, 석민은 이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석민이 군대에 있던 2년도 어떻게 어영부영 지나갔다. 제대한 후의 석민은 이 관계를 회생시키고 싶었다. 어쨌거나 민규는 석민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지대한 부분과 세월을 차지한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아직 좋아했다. 서로에게 완벽한 짝은 아닐 수 있지만 이보다 더 친구로서, 또 연인으로서 편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석민은 지금까지의 문제가 함께 지낼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했고, 어떻게든 짬을 내려고 노력했다. 민규도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석민은 복학한 뒤에 곧 취업 준비를 해야 했고, 민규는 주방에서 중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오프에도 주방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다. 둘은 만나서 섹스는커녕 얼굴을 마주 보고 회포를 털어놓을 여유조차 찾기 힘들었다. 그 과정의 어느 즈음에서, 석민은 자신도 모르게 노력하는 것을 포기했다. 연락은 정말 이대로는 끝이겠다 싶을 때에서야 했다. 얼마 후에는 다른 사람과 내키는 대로 잤고, 그걸 굳이 민규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처음에 민규는 석민의 그런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얼마 가지 못 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민규였다. 석민은 기다렸다는 듯 불같이 화를 냈다. 민규 역시 지지 않고 그간 쌓인 것을 토해내며 분개했다. 몇 년이나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죄 쏟아져 나와 둘 다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싸움 뒤에 둘은 서로를 정말 지워버리기로 마음 먹고 유형, 무형을 가리지 않고 서로에 관한 것을 청산해나갔다. 석민은 적어도 그 중 일부를 실천했다. 서로에 대해 잊은 채, 석민은 졸업을 했고 대기업의 시스템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그동안 석민은 몇 번의 연애를 시도했다. 만남에 진지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모두 금세 마무리되었다. 민규에게 너무 익숙해진 탓이라 생각해 연애에 더욱 매진해보기도 했지만 생각처럼 되진 않았다. 게다가 회사는 자신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어 생활의 균형을 찾기도 힘들었다. 김민규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면 거짓말이고 가끔 생각나긴 했지만 다시 만나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둘은 석민이 입사 후 첫 회식에서 2차를 가는 길에 재회했다.
민규의 옆에는 애인으로 보이는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석민은 한눈에 둘의 관계를 알아채고 모르는 척 민규를 지나쳐 갔다. 민규가 뚫어져라 자신의 뒷통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 채 만취한 과장님을 들처 업고 걸어갔다. 다음날 아침, 석민이 일어나기도 전에 민규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잘 지내냐.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문자였지만 거기에 석민이 답할 도리 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아 서글펐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이 시작됐다.
이후의 상황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둘은 어쩌다보니 다시 연락을 하면서 지내게 됐고, 다시 만난 민규는 어느새 부주방장이 되어서 오히려 전보다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남자도 만나면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한 두번 만나다 보니 예전처럼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섹스를 하게 됐고, 민규는 애인과 헤어졌고, 서로 다시 사귄다는 말은 한 번도 꺼낸 적 없었으며, 각자 만나는 사람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한 달에 한 두 번씩 만나서 꼭 섹스를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런 식의 만남을 근 1년간 유지해왔다. 연인도, 섹스 파트너도, 친구도, 무엇도 아닌 관계를 이만 확실히 정의해야 한다고 매번 생각했지만 막상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이대로도 괜찮을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에 마비되었다. 정말 안되는데, 석민은 이번에도 민규를 순순히 제 집에 들이고 말았다. 텅 빈 냉장고를 채워줄 장을 한 아름 봐갖고 들어오니, 불가항력이었다.
"양파 절임 먹으라니까 왜 안 먹고 그대로 내버려뒀어."
냉장고에 장 봐온 것을 채우며 민규가 핀잔을 주었다.
"양파 싫어하는 거 알잖아."
석민은 그 어느 때보다 심란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TV의 채널을 돌렸다. 돌아보는 민규의 시선이 목덜미에 따갑게 닿았다.
"내가 해준 건 다 먹겠다고 했으면서."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우리가 사랑에 넘쳤을 때?"
냉장고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고, 곧 민규가 다가와 석민의 옆에 앉았다. 석민은 민규가 사용한 단어들을 곱씹어 보았다. '우리'와 '사랑'은, 지금 이런 애매한 관계에서 꺼낼 만한 단어들은 아니었다. 민규가 둔감한 편이긴 해도 이 정도로 석민을 기만하듯 예민한 단어를 남발하진 않았다.
"야-"
"왜 이렇게 말랐어."
어느새 민규의 손이 석민의 셔츠 아래로 들어와 있었다. 석민은 순간 귀가 잘못되었다고 믿고 싶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라니. 지난 번에 보고 난 뒤로 고작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일주일 동안 민규는 다른 남자와 한 번 잤다고 자신에게 보고하기까지 했다. 서로에게 어떤 규제를 걸 만한 입장이 아니란 것은 잘 알지만-, 석민은 민규의 뻔뻔함에 치를 떨며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욕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야."
석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민규의 손은 겁없이 석민의 허리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거 이제 그만하자."
"이게 뭔데?"
손이 유두께까지 올라왔다.
"그만 하자고."
그제서야 민규의 손이 멈췄다. 석민은 단숨에 민규와 보냈던 시간들 속에서 매번 자신이 무언가를 결단하는 역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석민을 지치게 만든 것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우린 대체 뭐가 문제냐."
김 빠진 질문이었다. 사실, 민규의 성실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기대'는 석민을 사소한 것에 얽매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민규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얼굴이 이제껏 본 적 없던 종류의 것이어서 석민은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모조리 까먹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제 사정을 털어놓을 것 같았던 민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석민이 원하는 답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고 외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가 닳을 때쯤 민규가 입을 열었다.
"뻔하잖아."
뻔하긴 뭐가, 석민이 성급하게 대답하기도 전에 민규가 읊어대기 시작했다.
"속궁합 존나 잘 맞고 한 놈이 술만 마시면 다른 놈 어디 갔냐고 울고 불고 지랄인데 안 사귀는 거."
"⋯⋯."
"내가 너 성감대 열 개는 더 찾아서 울면서 매달리게 할 수 있는데 니가 자꾸 그만 떡치자고 말하는 거."
"야, 이-"
"서로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둘 다 입이 삐뚤어져도 말 못하는 등신이라는 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역시 모르는 게 아니었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한편으론 배신감이 뒤엉켰다.
민규는 석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도 난 여기까지 말했으니까 내가 너보단 낫다."
"...뭐래냐."
"내가 진짜 너 아는데, 넌 죽어도 말 못 해."
"⋯⋯."
"거봐, 입 뻥긋도 못 하는 거."
득의양양한 꼴이 보기 싫어 원하는 대로 말해주고 싶었지만 분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서 죽기보다 싫은 게 김민규 말대로 되는 건데, 세상은 불공평하게도 대체로 민규의 편을 들어주었다. 내가 더 착하게 살았는데, 석민은 억울했다.
석민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아무 말도 못하는 동안 민규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후라이팬에 올려뒀던 프렌치 토스트를 꺼내왔다. 토스트와 함께 석민이 애용하는 컵에 커피를 따라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숙한 제 자리를 찾아갔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걸 채워서 우리 관계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면, 석민은 그것만으로도 시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야."
"왜 못난아."
먼저 토스트를 집어 먹는 민규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일 짐 싸갖고 우리 집 와."
"어?"
민규가 놀라서 돌아보는 바람에 손에 들려 있던 토스트가 가루를 흩날리며 접시에 다시 떨어졌다. 이런 점까지 예상 가능하지만 그게 싫지 만은 않다.
"니가 이제까지 거덜 낸 칫솔이나 좀 사오고."
"그거 맨날 안 버렸으면 거덜 날 일도 없었을 텐데⋯."
"씁, 잔말 말고 사와라."
민규는 더 군말 않고 석민의 허리를 끌어 안아 기대었다. 석민은 제 허리에 감긴 민규의 손을 잡아 쥐었다. 서로에게 바라는 말을 당장 할 순 없다. 그래도 지금이 어떤 시작일 것이라 믿는다. 내일은 여느 날들과는 조금 다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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