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투디

[리에쿠로보쿠] Innocent as Sheet _ B





리에프는 이곳에서 가장 그럴싸한 중급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고작 중급이었다. 마루는 낡아서 걸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욕실의 백열구는 완전연소를 목전에 두어 희미하게 깜빡거렸다. 무엇보다, 관리인이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이곳에 묵었을 몇 사람이고의 냄새가 누적되어 방 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내가 질색팔색을 하며 호텔을 바꾸라고 해도 리에프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이사할 건데 짐 옮기기 귀찮아요, 따위의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사실 손톱 만한 객실을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채운 그의 짐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아예 거주하기 위해 왔다는 말이 정말 말 그대로였는지 러시아에서의 살림살이를 몽땅 가져온 모양이었다. 심지어 5살 때부터 모았다고 하는 유리 공예품 같은 것도 잔뜩 있어 내가 그 좁은 방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크게 할라치면 리에프는 '조심, 조심해요!' 하고 전전긍긍하기 바빴다. 계속된 경고를 받고 화가 나 이럴 거면 애초에 왜 이딴 좁아터진 곳을 골랐느냐고 물었더니 '당장 파파가 돈을 얼마 안 줘서 고급은 무리였다구요' 칭얼거리기까지 한다. 나는 속이 터졌다.


  덕분에 데이트는 주로 바깥에서 하게 되었다. 돈이 얼마 없어서 고급 호텔은 무리라고 말하는 주제에 쇼핑에 쓰는 돈은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소비력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내가 놀랄 정도로 아낌이 없었다.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 부잣집 도련님의 안목과 헤픈 지갑이 만나 돈은 역시 쓸 줄 아는 놈이 제일 잘 쓴다는 명구名句를 떠올리게 했다. 어떤 때는 내가 그의 소비를 말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 망할 놈의 유리 공예품을 사 모을 때였다. 리에프는 그것들을 볼 때마다 아주 눈이 돌아갔다. 작은 충격에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싸구려부터 경매에 고가로 불릴 물건까지 종류도 가리지 않았다. 애를 도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이 따위에 집착하게 만들고. 파파라는 놈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놀러다니기만 했느냐면, 나는 내 본분에 충실했노라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다. 사실 내 본업은 부동산 중개업이지만 리에프의 개인적인 선호에 맞추어 부업인 스타일리스트 노릇을 더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는 색채의 배치에 있어서의 나의 감각, 특히 은백색과 이룰 수 있는 색깔 조합을 좋아했다. 그 자신의 머리색깔이 은백색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리에프는 눈에 확연히 띄는 것보다 사소한 장신구로 멋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제 또래가 많이 모인 파티에 간다길래, 캐주얼하게 멋을 주고 싶어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히고, 암갈색 로퍼를 신긴 뒤, 와이셔츠의 맨 위 것과 두 번째 단추는 풀어준다. 나는 벌써 박스가 모자랄 정도로 꽉 찬 장신구들을 둘러보다가 시트린citrine 커프 링크스를 골라 직접 소매를 집어준다. 네 눈 색깔이랑 잘 어울려, 이런 말을 해주면 리에프는 정말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잘 커팅된 시트린과 제 눈동자를 한 시야에 담아 거울을 몇 번이고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친구들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했다며 나에게 밤새도록 재잘댄다. 나는 그 재잘거림이 싫지 않았다.


  보쿠토와 보냈던 시간들은 대개 리에프와의 것이 되어버렸다. 보쿠토에게는 리에프를 새로운 작업 상대, 낚기 쉬운 애송이 정도로 소개해두었다. 그것은 사실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문제였다. 내가 보쿠토와 한탕을 올리고 난 뒤에 하던 세레머니를 리에프와 하게 된 것이 말하지 않은 사실들 중 하나였다. 한탕이 없어도, 리에프는 나를 좋아하고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들켜도 상관없긴 하지만 알려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보쿠토에게 허락된 암묵적인 우리의 룰은 나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다른 말하지 않은 사실들은, 리에프가 내게 단순한 작업 상대 이상이라는 것. 또, 내가 당분간 리에프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 말했을 때 보쿠토의 눈빛에 스친 감정들을 일부러 무시했다는 것, 그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결백하다.


  어쩌면 보쿠토를 도발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옷매무새를 만져주겠다는 핑계로 백화점 탈의실에 함께 들어가 리에프와 키스를 하며, 보쿠토에게 이 장면을 들키는 상상을 했다가, 문득 그런 자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가 나를 상처 입히기 위해 한 행동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의 사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라는 수식어를 스스로 붙였지만 때로 사람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입밖으로 내뱉음으로써 그것을 이해하려 애쓴다. 부질없게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에프가 우리 관계의 피해자이거나 내가 리에프를 이용했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리에프와의 관계는 지극히 현실에 충실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본래, 내가 손 쓸 수 없는 선택지와 만나지 않도록 현실에 신중한 편인데, 그와의 관계에서 신중을 기하기 위한 두뇌회전은 쉬이 공회전이 되어버렸다. 리에프의 녹색 눈동자에는 타인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나도 그 타인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당장 내가 내린 어떤 결정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리에프와 있을 때, 현실을 망각하는 동시에 그 순간에 가장 충실하게 되었다.


  그날도 그런 것이었다. 새로운 대저택에 입주한 한 부호의 파티에 나와 리에프 둘 다 초대되었다. 이 파티에는 분명 보쿠토도 참석할 것이다, 그것도 그의 작업 대상과 함께. 이제껏 수많은 파티에 리에프와 함께 나갔지만 보쿠토가 올 만한 파티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어색한 조우는 피하고 싶다. 보쿠토에게 리에프 얘기를 하긴 했지만 얼굴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보쿠토가 리에프를 보고 무슨 말을 할 지, 나는 거기에 무어라 대답할 지 스스로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대장을 들고 망설이는 내게 리에프고 무릎을 구부리고, 시선의 높이를 맞춰 오며 말했다. 쿠로상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거절하는 방법 또한 모른다.


  파티는 성대했다. 저택의 주인인 부호가 잔뜩 힘을 준 것이 구석구석 느껴졌다. 나는 너른 메인 홀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의 난간에 기대어 혹여나 보쿠토와 마주칠까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아직 안 온 모양이었다. 리에프가 곧 샴페인을 가져왔다. 오늘은 그에게 블랙에 가까운 짙은 네이비 수트와 와이셔츠를 입히고 체스트 포켓에 백매白梅 모양을 한 브로치를 달아 포인트를 주었는데, 핑크골드의 샴페인 색깔과 아주 잘 어울려 대번에 뿌듯해졌다. 반면에 나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흰색 와이셔츠에 블랙 수트로, 위장의 본분을 다했지만 마음은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았다.


  "이런 저택은 어때?"

  "글쎄여, 난 이것보다 작고 모던한 게 좋아요."

  "난 커다란 집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에, 왜여?"

  "네 유리 장난감들 다 전시하려면 코딱지 만한 집 갖고 되겠어? 그런 건 보여주지도 않을 거야."

  "쿠로상이 조금만 조심하면 되는 걸여. 클라이언트 취향을 우선시 해주시져."


  녹색의 눈동자는 당당함을 머금고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너 제법 혀가 길어졌다? 혀 길이⋯? 그대론데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혀를 내밀어 길이를 확인하는 리에프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럼 그렇지. 리에프가 나와 지내고 나서 일본어 실력이 늘었다지만 관용구나 숙어를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 녀석을 놀리는 게 재밌지만 당장은 초조함 때문인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싱겁게 웃어보인 뒤 샴페인 한 모금을 성급히 들이키며 다시 메인홀을 주시했다. 언제 들어왔던 걸까, 파트너와 팔짱을 낀 채 다른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보쿠토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쿠토 곁에 있는 파트너, 작업 상대, 아니, 파트너는 젊고 아주 예쁜 사람이었다. 작업 상대로 만나고 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멀리서 보아도 그냥 아가씨가 아닌, 좋은 집안의 잘 자란 영애令愛였다. 보쿠토가 자신의 작업 상대들을 몇 번 데려와 내게 소개할 때 느끼곤 했던, 회의감이 순식간에 몰려와 목을 죄었다. 찬 공기를 쐬어야 한다. 2층 곳곳에 난 테라스 중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찬바람이 훅 끼쳤다. 담배를, 피워야, 한다. 그럴 요량으로 주머니의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생각이 자꾸 헛발을 디뎌 담배를 꺼내어 무는 동작에서 멈추었다. 보쿠토와, 아가씨. 나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이전에, 나는 나의 행복이 보쿠토의 것과 함께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잘못된 믿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게 반드시 '나와 함께'는 아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게 힘겨워 한 번도 너에게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나는 신중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 모든 것의 전제는 네 행복이 내 행복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이제 와 대전제가 오판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니, 알고 있었던 사실을 지금에서야 인정한다.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보쿠토를 갈림길에서 떠나 보낸 셈이다.


  "불 줘요?"


  어느새 따라나온 리에프가 물었다. 담배는 여전히 불 없이 입술에 걸친 채였다.


  "아니."

  "쿠로상 애인 얼굴 처음 봤네."


  봤어? 하고 능청스레 물을 기력이 없었다.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말끔한 리에프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동자의 색깔은 아까의 청록과는 다르게, 암녹색을 띄고 있었다. 아마도 어두운 밤중에 저택 안에서 비춰오는 빛이 전부이기 때문이리라. 빛이 반사되어 나타나는 장난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차라리 신비라 믿어버렸다.


  "저보단 못생겼던데여."

  "뭐래."

  "아니, 객관적으로 그렇잖아여."

  "내 눈엔 아닌데."

  "와, 쿠로상 진짜."


  리에프는 섭섭한 척을 했다. 그에 대해 신경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아 놀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리에프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굳은 빛을 띄고 있어 나는 다시 현실감을 잃는다. 동시에 눈앞의 리에프에게, 이 순간에 충실하게 된다. 한 발 다가와, 나를 끌어 안았다. 입술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던 담배가 그의 어깨를 치고 떨어졌다. 불을 붙이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리에프의 어깻죽지를 있는 힘을 다해 잡아 당기듯 안았다. 내 안의 온 슬픔을 다해 그를 끌어 안았다.


  "애인, 맞을까."


  누가, 누구의, 따윈 없다. 다 뭉개진 내 목소리에 리에프가 답했다.


  "응, 맞아요."


  너는 누구를 얘기하고, 나는 누구를 얘기했던 걸까. 훗날 내가 지난 기억을 돌이켜, 너에게 오늘의 대답에 대해서 들을 수 있기를, 진실로, 진실로 바란다.




'투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쿠로다이] 오래된 연인의 초상  (0) 2015.09.03
[재프스팁] 실수  (0) 2015.08.30
[리에쿠로] 裏  (0) 2015.08.03
[우카쿠로] 고양이와 담배  (0) 2015.07.27
[켄쿠로리에] Rhapsody in Blue - 下  (0) 2015.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