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였네.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에는 확신마저 깃들여 있었다. 재프 렌프로는 가만히 스티븐 A. 스타페이즈가 옷을 꿰어 입는 것을 감상했다. 마르고 작지만 의외로 탄력있게 올라 붙은 엉덩이의 근육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애프터 서비스로 훌륭했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저런 거라니, 정말 심장까지 얼어붙은 게 아닐까 싶다.
어제하고 온도차 너무 많이 나는 것 아닙니까. 재프가 겨우 한 마디 할 때 즈음엔 스티븐은 어제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정장을 이미 빈틈없이 차려입은 후였다.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크게 구겨진 구석이 없어 만취해서 재프의 아파트까지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럽고 지저분한 재프의 아파트 한가운데 서 있는 스티븐은 이질적이었고, 그래서 꼭 낡아빠진 벽 한 면에 난데없이 걸린 한 폭의 값비싼 유화 같은 풍미가 있었다. 예술이라곤 쥐뿔도 모르는 재프에게도 그런 아이러니컬한 운치가 제법 멋들어지게 느껴져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은 현관문 앞에 서서 아직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님을 배웅하는 태도가 영 돼먹지 않다고 생각했다. 말해 무엇하나, 원래 그런 남자인 것을. 애초에 여기에 온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낯선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스티븐은 핀잔을 주는 대신 못을 박았다. 자네도 실수일 테니 잊게. 돌아보는 눈빛은 재프에게 확신을 구하듯, 마치 설의법으로 쓰여진 문장 같았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이게 실수라고?
재프는 한참을 침대에서 스티븐이 남기고 간 말들을 주섬기다가 문득 열이 받았다. 온몸이 찝찝했다. 사실, 풀코스로 이루어진 정사를 마친 뒤 씻지도 않고 자서 더욱 그랬다. 화장실까지 비적비적 걸어가 이빨부터 닦았다. 입이 왜 이렇게 텁텁한가 했더니, 안 하던 펠라를 아주 오랜만에 한 탓이었다. 펠라까지 그렇게 정성 들여 해줬는데 생까려 하기나 하고 말야. 게다가 한 두번 펠라를 받아본 얼굴이 아니었다. 능란한 재프의 혀놀림에 만감이 서린 얼굴을 감추지 못해, 스티븐은 재프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말았다. 어제의 잠자리로 재프는 스티븐에 대해 완전히 새로 알았다고 해도 좋았다.
입안을 헹군 뒤 버린 물에 음모 한 가닥이 섞여 나왔다. 꼬부랑하고 짧은 털의 모양새에 재프는 침이 다 튀기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펠라를 열심히 했는데 칭찬 한 번 제대로 못 받다니, 조금 억울하다. 멀쩡했었다면 제법 한다는 식으로 에둘러 칭찬했을 성격인데, 어제의 스티븐은 그럴 정신도 없이 만취 상태였다. 재프 역시 맨정신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쾌락이 배가될 만큼만 적당히 취한 정도였었다.
지난 밤 술집에서 기분 좋게 취한 상태로 나온 재프는 헬-세일럼의 롯HellSalem's Lot 어느 거리에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스티븐과 조우했다. 재프 렌프로! 저 멀리에서 웬 주정뱅이가 본인도 낯설었을 발음을 외치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재프는 술기운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 기다란 다리를 휘적거리며 재프의 앞까지 온 스티븐에게선 위스키 냄새며 이계의 것이며 온갖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라이브라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로비를 전담한 스티븐이 종종 숙취에 절어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있는 것은 보았지만, 당장 취한 모습을 본 건 재프에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마신 겁니까? 재프가 스티븐을 부축하며 꿍얼거렸다. 스티븐은 세상 모든 주정뱅이들이 그러하듯이,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흐느러뜨리며 생떼까지 썼다. 취미가 고약한 양반이었지. 아직 덜 마셨는데 자네 집에 가서 마시는 건 어떤가?
난생 처음 받는 그 제안은 고마운데- 재프는 신랄한 거절을 하려다 스티븐의 목에 울긋불긋 솟아난 자욱들을 발견했다. 술에 취해 시야가 가물가물한 데다 목선에서 시작되는 스티븐의 문신 색깔과 꼭 같아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할 뻔 했다. 그의 로비에는 밑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소문으로 들었던 건지, 제 망상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아무튼 헛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재프는 자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 있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 사실이 반가웠다.
재프의 아파트 현관문을 넘어서자마자 네 개의 다리는 앞을 다투어 엉켜 쓰러졌다. 현관에서부터 침대까지 두 남자의 허물이 이어졌다. 내뱉는 날숨에마저 서리가 일 줄 알았던 스티븐의 입안은 너무도 뜨거워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찬 공기를 틈틈이 들이 마셔 열기를 식혀야 했다. 재프가 셔츠 깃 사이로 엿보았던 붉은 자욱들은 의외로 쇄골께에서 끝나 있었지만 이제 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재프는 열락에 꿈틀거리는 스티븐의 몸에 새겨진 붉은 물결 옆에 제 나름의 문신을 그려 나갔다. 아, 아-. 재프가 입술을 묻을 때마다 스티븐은 바늘이 피부를 파고드는 통증을 느끼듯 탄성을 질렀다. 스티븐이 작게 일으키는 경련마다 재프는 사타구니가 당기는 전율을 느꼈다.
섹스는 두서 없고, 경박한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정직했다. 재프는 온 체중을 다해 삽입했고 스티븐은 허리를 바짝 들고 뭉툭한 손끝으로 재프의 어깻죽지를 힘껏 붙들었다. 몇 번이고 자세를 바꾸었는데, 서로의 몸에 더욱 깊이 밀착하려고 하는 것만은 같았다. 섞이는 호흡은 어느 샌가 박자를 같이 하고 있었고 겹쳐진 몸뚱이의 피부 색은 두 가지였지만 경계선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스티븐은 체력이 달려 끙끙거리며 간혹 그만하라는 말을 흘렸지만 재프는 전혀 듣지 않았다. 스티븐의 말과는 다르게 허리를 감은 다리와 구멍이 재프를 더욱 조여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쾌락을 넘어서자 재프는 오직 절정을 향한 추삽질 만을 해댔다. 그것은 파정을 목적으로 하는 짐승의 교미와 닮아 있었다.
전신이 격렬하게 흔들릴수록 점점 붉어지는 스티븐의 뒷목을 떠올렸다. 재프는 제 귀두를 문지르는 손길에 사정감을 느끼며 그 발간 목덜미를 물어뜯는 상상을 했다. 손끝에 걸린 끈적한 정액은 이내 흐르는 물에 씻겨져 수채 구멍을 통해 빠져 내려갔다. 젠장.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샤워기를 잠근 뒤 나와서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다가, 휴지통의 뚜껑이 보란 듯이 어긋나게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휴지통의 발을 밟으니 새 칫솔이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이 아저씨가, 남의 칫솔을 함부로 뜯어서 쓰고 난리야. 칫솔 하나에 재프의 뇌리에는 오만 감정이 스쳤다. 우선 어제 일은 실수라고 거듭 강조한 주제에 꼬박 씻고 나간 그 결벽이 퍽 웃겼고, 제가 한 말을 결코 무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마냥 고작 한 번 쓴 칫솔을 쓰레기통에 갖다 처박은 것은 차라리 코미디였다. 그리고 굽은 등에, 제게는 무심하던 인간이 갑자기 꼬장꼬장하게 나오니 당황스럽다기보다 화가 났다. 그럼에도 자꾸만, 힘들게 접힌 허리에서 마른 골반을 지나 적당히 살이 잡히는 허벅지에 이르는 굽은 선이 떠올랐다. 자꾸만, 자꾸만 떠올라,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었다.
*
재프는 라이브라 사무실 소파에 홀로 누워있다가, 스티븐을 떠올렸다. 소파에 눕기 전에도 스티븐을 떠올렸고, 어제도, 그 전날에도 스티븐을 떠올렸지만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스티븐을 떠올렸다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그 날의 스티븐에 관한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재프가 상기하는 스티븐의 마지막에는 항상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남았다.
그에겐 실수일지언정 재프에게 그날 밤의 일은 절대 실수가 아니었다. 실수라는 것은 본래, 잊고 싶고 다시는 저지르고 싶지 않아야 하는 법 아닌가. 그렇다면 '실수'는 재프에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니다. 재프는 그날 이후 스티븐과의 정사를 한순간도 곱씹지 않은 적이 없었고 언제든 다시 그와 관계를 맺고 싶은 갈망에 몸부림쳤다. 그 관계가 섹스가 되었든 거창한 연애가 되었든 무엇이든 좋다. 다만 스티븐을 다시 만지고 싶다. 다시 만진다면 당황할지, 흥분할지,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릴지 궁금하다. 그날 밤 전혀 몰랐던 스티븐을 알게 되었던 것처럼 그의 미지를 탐험하고 싶은 욕망이 온통 재프를 지배했다.
스티븐에게도 '실수'는 얄팍한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재프는 그렇게 직감했다. 스티븐은 그 일을 그저 술기운에 자신을 잃고 인사불성에 저지른 사고incident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겠지만, 재프가 아는 스티븐은 아무리 취했어도 근본 없는 감정에 제 몸을 내어주고 휘두르게 놔두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스티븐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고 해도 변함 없는 사실일 테다. 무엇보다 그날 밤, 고된 허릿짓에 흐릿해진 스티븐의 눈빛에 일순 단순한 정욕이 아닌 재프 자신에 대한 갈급함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재프가 흥분하여 무작정 스티븐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고, 스티븐은 그런 재프를 한층 더 당겼으니, 분명 잘못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과의 하룻밤을 부정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재프는 난생 처음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전뇌whole brain를 동원했다. 조직의 치부와 술기운에 원나잇을 한 게 수치스러워서? 사내연애 금지라는 규칙이라도 있나? 한 번 해보고 나니 생각보다 좋지 않아서 두 번은 하지 말자? 아니, 마지막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날 밤의 마지막 삽입은 술기운이 슬슬 떨어져가자 스티븐이 너무 힘들어해서 겨우 멈춘 것이었다.
아마 재프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답을 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답을 갖고 있는 이는 재프에게 도통 협조적이지 않았다. 전에는 마주치기 싫어도 불쑥 잘만 나타나던 얼굴이, 요즘에는 보려고 애를 써도 뜸했다. 일부러 피하는 것이 틀림없다. 재프는 확신을 팔짱에 욱여넣은 채 라이브라 사무실에서 뻗대어 봤지만 스티븐은 뜻대로 나타나 주지 않았다. 하필이면 요 며칠 새 큰 사건도 없고 자잘한 소동 뿐이어서 억지로 보아야 하는 일도 없었다. 혈계의 권속이라도 나타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혈계의 권속이 아니더라도 스티븐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소란을 부러 일으킬 용의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만큼 재프는 간절했다.
하릴없이 사무실 소파에 늘어진 재프의 귀에 크라우스와 체인의 대화가 들렸다. 현장에는? 지금은 스티븐 씨 혼자 나가 있습니다. 사건 발생 위치는 어디지? 1573 매디슨 에비뉴, 센트럴 파크 이스트 하이스쿨입니다. 사건은 곧 마무리 될 것 같다고- 거기까지 들은 재프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어디서 무얼 하나 했더니 평소에 잘 안 하던 현장요원 노릇까지 하고 있고. 치밀어오르는 부아는 꼬박 버려진 칫솔을 목격했을 때와 비슷했다. 재프는 한 손에 쥔 지포를 손톱이 닿을 정도로 딸각거리며, 그 박자에 맞춰 스쿠터의 엑셀을 계속해서 밟았다. 다급하게 도착한 현장은 과연 체인의 말대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멀리서 나는 연기를 배경으로 낯익은 기다란 형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재프는 스쿠터를 당장 내버리고 조금 휘청거리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잡았다."
"-재프?"
재프는 스티븐과 조우했던 그날 밤처럼, 그의 몸을 훑다가 못 보던 붉은색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이번에는 피였다. 스티븐의 찢어진 오른쪽 소매 아래로 새빨간 피가 흐르다, 그의 얼음에 흐름이 저지되어 박제되어 있었다.
"상처 입었잖아, 가서 치료해요."
"괜찮네. 지혈도 했고⋯."
"그건 땜빵이고. 빨리 와요."
스티븐의 만류를 무시한 채 재프는 그를 구급차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스티븐 혼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작은 사건이었어도 여기저기에서 부상자가 나온 모양인지 현장은 온통 빨간 불빛으로 휘감은 구급차와 경찰차로 둘러싸였다. 재프는 스티븐을 가장 가까운 구급차 끄트머리 턱에 앉히고 구급 키트를 끌어다 붕대와 소독약 등 필요한 도구들을 모두 꺼내었다. 그 사이 스티븐은 하는 수 없이 제 임시방편을 해제시키고 있었다. 얼음이 녹자 응고되었던 피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깊지 않았지만, 상처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이런 자잘한 상처는 생소했다.
"스타페이즈 씨가 이런 상처를 다 입고, 별일이네."
"방심했네."
"거 자꾸 얼리려고 하지 마요. 그런다고 안 아픈 거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 읏⋯!"
팔뚝에서부터 다시 서리가 생기는 걸 재프가 소독약을 묻힌 거즈로 닦아냈다. 스티븐은 커닝을 하려다 들킨 어린 아이처럼 시선을 떨구며 재프의 치료를 얌전히 받았다. 피를 닦아내고 상처에 약을 바르는 재프의 손놀림은 제법 능숙했다. 아마도 본인의 수많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스티븐은 짤막한 데자뷰를 느꼈지만 찰나에 다시 잊어버렸다.
"그날 밤도, 방심한 겁니까?"
재프는 붕대를 꺼내 감기 시작하면서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마침 상처를 압박 당한 스티븐은 당혹스러움에선지 상처 때문인지 몸이 흔들릴 정도로 움찔했다. 재프는 개의치 않고 붕대를 계속해서 감았다. 팔뚝에서부터 촘촘히 감아 내려가는 손길은 투박하지만 신중했다.
"나는 이 상처 같은 거고."
"⋯마음이 느슨해지긴 했지."
"좋네요. 느슨한 스타페이즈 씨."
스티븐은 일찍이 재프가 이처럼 불편했던 적이 없었다. 상처고 뭐고 뿌리쳐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제 팔을 붙든 남자의 힘은 그럴 경우를 대비하기라도 한 듯 묵직했다. 스티븐은 방금 전 사건으로 먼지가 내려앉은 아랫입술을 혀로 핥아 적셨다. 혀 끝이, 곧 입안이 텁텁해졌다.
"느슨해져서 저지른 실수라 해도 상관없어요."
어느새 재프의 손은 스티븐의 오른손을 감고 있었다. 붕대가 어찌나 얄팍한지 아무런 가림막 구실을 하지 못해 재프의 손에 담긴 열기가 고스란히 스티븐에게 전해졌다. 입 속의 혀는 그 열기에 씁쓸함마저 음미하고 있었다.
"난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
"다 됐어요. 난 이만 갈 테니까."
재프는 손을 털고 구급차 바깥에 섰다. 그는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스티븐은 재프의 손이 빚어낸 것치곤 멀쩡하게 감긴 붕대를 한 번 내려다 보았다가,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그냥 갈 건가?"
"왜, 아쉬워요?"
"아니, 의외라고 생각했지."
"난 타이밍은 잘 맞추니까요. 치고 빠질 때를 잘 알지."
그랬던가. 스티븐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재프를 보며 돌이켜 보았다. 확실히, 재프 렌프로는 동물과 비견할 만큼 감이 좋은 남자이다. 본능에 있어서라면 그의 말을 믿어도 좋다. 판단의 대상이 자의로 행해진 스티븐 자신의 행동일지라도, 스티븐은 아마 재프의 말을 믿어도 좋을 것이라 내심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자각 속에 선명하게 띄우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프는 등을 돌려 스티븐에게 손을 흔들었다.
"갑니다."
"재프."
"예?"
"⋯아닐세. 나중에 보지."
"싱겁긴."
재프는 현장에 왔을 때와는 반대로 느긋하게 이곳에서 걸어 나갔다.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스티븐은 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겨우 사무실로 돌아가야 할 일을 떠올렸다. 현장에서 벗어나 택시를 탈 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소음으로 가득한 현장에서 멀어질수록 스티븐은 제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맥박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긴장이 갑자기 풀려서 그런가. 열이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상처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스티븐은 스스로를 종잡을 수 없었다.
스티븐은 자못 진지했던 재프의 눈을 되새겼다. 그 눈빛이 다시금 자신을 향하질 않길 바랐었는데. 흐릿했던 기억은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주장하듯 새로이 덧발라졌다. 너무도 선연해 스티븐이 흘려보낼 수 없게끔, 재프의 눈동자는 스티븐의 기억속에서 완연한 형상을 갖추어 반복해서 말을 걸었다. 스티븐은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자넨 이 상처와는 달라. 얼마든지 입고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그에게는 들릴 리가 없는 답이었다. 맥박은 어느새 제 속도를 되찾았다.
5번가로 나와, 병동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뒷자리에 안착한 스티븐은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오늘 밤은 그에게도 조금 추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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