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불빛으로 수놓아진 요정 앞에 낡은 검은색 세단이 멈춰섰다. 세단의 운전석에서 내린 쿠로오 테츠로는 차 지붕 위에 붙어있던 사이렌을 그제사 발견하고는 떼어 내어 차 안에 대충 던져넣었다. 사이렌을 떼어낸 자리에만 눈이 쌓이지 않은 지붕이 우스워 보여 주위의 눈도 좀 털어냈다.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 차가움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쿠로오의 얼굴에도 내려앉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돌담으로 둘러쌓인 요정을 보며 쿠로오는 탑코트 주머니 안에 있던 종이를 꺼내었다. 종이에는 요정의 문패에 새겨진 것과 같은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뒷면에는 반대로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쿠로오는 그 종이가 아주 소중한 것인 양 도로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요정의 주인이 나와 쿠로오를 마중했다. 대문에서 정당까지 이어지는 돌길에도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사람이 얼마 드나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간 힘을 의식적으로 이완시켰다.
주인은 쿠로오를 가장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안에는 하이바 리에프가 앉아 있었다. 그는 쿠로오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쿠로오의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장갑을 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Добрый вечер, 쿠로상."
그것은 인사라기보다 하나의 의식에 가까웠다. 쿠로오에게는 더 이상 이 의식을 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 껄끄러운 리에프만의 매너가 되었지만, 적어도 리에프에게는 그랬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쿠로오와 함께 있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하던 인사였다.
"쿠로상은 양식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일부러 요정으로 골랐는데 마음에 들어요?"
"⋯상관없어."
쿠로오의 반응은 냉담했지만 리에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둘은 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3주 만의 재회였다. 그 길지 않은 시간은 리에프에게 있어 지옥 그 자체였다. 예전의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장갑을 벗어 드러난 쿠로오의 맨 손등을 보고 리에프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 얼어붙었다.
"이게 뭐예요."
"⋯⋯."
"이게 뭐냐고 물었잖아요."
"호들갑 떨지 마. 더 이상 같은 편인 척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지운 것뿐이야."
피부가 타서 흉하게 뒤집어진 자리에는 본래 단도를 휘감은 장미 문신이 있었다. 거기에는 맹세가 깃들여 있었다. 단도는 하이바 브라더후드의 차기 보스인 리에프를 상징했다. 그와 관련된 문신을 몸에 새길 수 있는 건 브라더후드에서 보스나 그의 후계자에게 굳은 신뢰를 받은 조직원 뿐이었다. 쿠로오의 오른손에 있던 맹약의 문신은 리에프가 직접 명령한 것이었다. 쿠로오는 제 입으로 리에프를 평생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약속했던 순간을 떠올렸다가 이내 남의 기억인마냥 떨쳐버렸다.
리에프는 제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그것이 아직도 거짓이길 바라고 있었다. 단순히 경찰의 급습인 줄 알았던 난동 중에 사라진 쿠로오를 찾자 자신을 말리던 부하의 고성 역시 착오이길 바랐었다. 이 자리에서 쿠로오의 손등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 허망한 자락을 쥐고 있었으나 지금은 뒤늦게 인정한 배신감이 뼈 마디마디마다 스며들었다. 리에프는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단 착각이 들었다.
"너까지 잡아 처넣는 것도 시간 문제야. 협상 같은 거 할 생각 마라."
"⋯⋯."
"아니면, 아직도 구질거리게 내가 네 편일 거라고 믿고 있나?"
쿠로오의 목소리는 그 어떤 날붙이보다 첨예하고 공격적이었다. 그의 말은 정확히 리에프를 향해 찔러 들었고 리에프는 무방비의 상태로 쿠로오를 응시하기만 했다. 깜빡이는 것을 잊어 눈동자가 아려왔다. 시린 통증을 덮기 위해 눈물이 나오려 했으나 리에프는 눈꺼풀을 당기는 힘으로 눈물을 참아냈다.
리에프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보란 듯이 식탁 위에 올려진 쿠로오의 오른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증오스럽다. 몇 번이고, 아니 쿠로오의 신체 부위 중에서 어떤 곳보다 가장 많이 입을 맞추었던 저 손등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다. 한편으로는 저 배신의 증거를 '상처'로 보이게 만드는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시야가 증오스럽기도 했다.
"쿠로상, 당신이 그날 전에 그랬죠. '사람을 죽이는 데 꼭 흉기나 물건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
"그게 이걸 말한 거였어?"
쿠로오의 입술은 틈 하나 없이 다물려 열릴 생각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쿠로오의 시선에, 리에프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눈 깜짝할 새 빼들어 쿠로오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내리꽂았다. 쿠로오의 손등에 새겨져 있었던 그 단도였다. 그래도 리에프를 향한 그의 시선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전에, 리에프는 그런 쿠로오의 면모를 아꼈다. 그러나 지금은 증오의 또다른 증폭제가 될 뿐이었다.
"대답해, 이걸 말한 거였냐고!"
"내가 너한테 대답해야 할 의무 같은 건 더 이상 없어."
리에프는 쿠로오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셔츠깃을 어찌나 세게 틀어 쥐었는지 꼭 채웠던 첫 번째 단추가 날아가고 쇄골께의 속살이 보였다. 오른 손등의 문신과는 달리 어깻죽지에 새겨진 별 문양은 그대로였다. 얼핏 훑으니 나머지 문신들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더 끊어질 수도 없는 이성이 다발로 끊겨 나가는 것 같았다.
"다른 문신도 다 없애주겠-"
"그쯤 해라."
어느새 총구가 리에프의 이마 정중앙에 겨누어져 있었다. 총구에 가려진 시야 사이로 서로를 마주 보았지만 서로가 마주 본 모습은 너무도 달랐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흔들리는 동공 때문에 시야조차 바로 잡지 못하는 얼굴은 지나치게 대조적이었다.
"쿠로상, 나 못 쏘잖아."
"⋯⋯."
"못 쏘는 거 다 알아."
리에프가 쿠로오의 셔츠를 더욱 젖히려 들었다. 쿠로오는 망설임 없이 해머를 당겼다. 찰칵 하고 걸리는 차가운 소리가 리에프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막아섰다. 리에프는 쿠로오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당장 제 두개골을 박살낼 총탄 따위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쿠로오의 눈빛에 이미 가장 잔인한 죽음을 선고 받은 기분이었다.
"농담하지 마요."
"⋯⋯."
"당신 반대편에 앉아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야."
"⋯⋯."
"제발, 쿠로상⋯."
패닉에 빠진 리에프의 온몸에서 힘이 빠지자 쿠로오도 리볼버를 내려놓았다. 리에프는 떨군 고개를 도저히 들 수 없었다. 총을 거두는 쿠로오가 잔정의 찌꺼기마저 남아있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봐, 계략에 넘어간 것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리에프가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봐 무서워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쿠로오가 일어나 코트를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리에프는 상을 빙 돌아 방을 나가려는 쿠로오의 손목을 붙들었다. 여전히 그의 고개는 떨궈진 채였다. 눈은 초점도 없이 허공을 방황하고 있었다. 입술과 혀도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인지 반쯤 열린 입술 새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의식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쿠로오의 오른 손목을 붙든 아귀힘 뿐이었다. 곧장 손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은 힘이었다.
"넌 바보니까 분명 허튼 짓거릴 생각하고 있겠지."
"⋯⋯."
"마지막 경고다, 안 하는 게 좋아. 이 주위에 이미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어."
"⋯⋯."
"나야 네가 일을 저지르면 널 잡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으니까 좋지만, 잘 생각해야 할 거다."
바보짓이라 해도 상관없다. 최악의 상황은 이미 이곳 발 아래 펼쳐져 있으니, 여기서 한 개쯤 더 나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리에프는 결국 손의 힘을 풀고 말았다. 당장 파괴적인 충동에 쥐었던 쿠로오의 손목을 가만히 놓아준 것은 한 치 앞의 돌발상황을 우려해서가 아니었다. 차디차기만 할 줄 알았던 배신자의 동맥이 여전히 펄떡거리고 따뜻해서, 몇 번이나 입을 맞추었던 살결의 감촉과 너무도 닮아있어 의지를 상실하고 만 것이었다.
쿠로오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이제 미련은 남기지 말아야 한다.
"식사를 못 했으니 이 초대는 없던 것으로 하지, 료바쉬카."
한 번도 불러주지 못 했던 애칭과 함께 쿠로오는 코트 주머니에서 요정의 이름이 적혀 있던 종이를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이 리에프에게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 리에프의 표정 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작별의 시간이다.
"다음에 얼굴을 볼 때에는 철창에서 보게 될 거다."
뒤의 문을 닫았다. 그대로 앞으로 복도를 내리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쿠로오는 지금껏 참았던 한숨들을 죄 뱉어내었다. 목을 조르는 통증은 잠시 사라지는 것 같았다가 다시 뱃속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장을 타고 올라와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 같기도 했다. 쿠로오는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억눌렀다. 뱃가죽을 달구고 기도를 틀어막으려 드는 모든 것들을 삼켜 눌러 담았다. 들쑥날쑥 했던 호흡이 겨우 진정되었다.
요정을 나가는 길에 가죽 장갑에 다시 손을 넣었다. 실은 오른 손등의 화상이 아직 낫지 않아 자극을 피해야 했지만 리에프를 도발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고통 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은 문신에 깃들여 있던 맹약과 닮아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꼭 흉기나 물건이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반드시 두 사람이 죽는다. 한 사람만 죽는 경우는 없다.
쿠로오는 가죽 장갑을 낀 오른 손바닥을 깊게 짓누르며, 리에프에게 답하지 못했던 대답을 파묻어버렸다.
'투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쿠로다이] 오래된 연인의 초상 (0) | 2015.09.03 |
---|---|
[재프스팁] 실수 (0) | 2015.08.30 |
[우카쿠로] 고양이와 담배 (0) | 2015.07.27 |
[켄쿠로리에] Rhapsody in Blue - 下 (0) | 2015.07.24 |
[켄쿠로리에] Rhapsody in Blue - 上 (0) | 2015.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