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쿠로오 테츠로상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임까?
어미를 제외하곤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 문장과 발음이었다. 맞는데, 라고 대답하자 녹색 눈동자에 은발을 한 장신의 남자가 '처음 뵙겠습니다, 일본인입니다.' 하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게 자기소개냐. 왜 그런식으로 소개했는지 알 법도 하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개로 자기를 설명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얼빠진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았지만 나는 더 응대해줄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 쳐다 보다가 결국 내가 못 이겨 물어보았다.
'이름은?'
'하이바 리에프임다. 바이올린 전공이에여.'
그건 네가 메고 있는 악기 케이스를 보면 굳이 말 안 해도 알아, 퉁명스레 대꾸할 뻔 했지만 겨우 참았다.
리에프는 러시아에서 유학 온 바이올린 전공의 1학년생이었다. 입단을 청하러 온 그 자리에서 러시아에서 제가 얼마나 유명하고 수많은 콩쿠르를 휩쓸었는지와 일본에 유학 온 과정 등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지만 귀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의 선포 비슷한 것뿐이었다.
'콘서트 마스터가 하고 싶어여. 이번 협주곡 솔로도.'
'그건 러시아에서도 할 수 있잖아?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당신의 지휘 아래에서 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리에프의 얼굴이 묘했다. 그것이 하이바 리에프와의 첫만남이었다.
리에프는 어느새 나를 '쿠로상'이라 부르고 있었다. 친근하게 구는 것이 콘서트 마스터 자리를 빨리 획득하기 위한 나름의 술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소용 없었다. 떠벌거린 콩쿠르 경력 등이 허튼 말은 아니었는지 실력은 있었는데, 콘서트 마스터 자리를 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1학년에게 콘서트 마스터 자리를 주는 경우는 없었다. 애송이는 애송이었다.
리에프가 들어온 뒤로 오케스트라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재' 켄마에게 집중되었던 중심은 '러시아에서 온 유망주' 리에프에게로 분산되어 양분되었다. 리에프는 제법 살가운 성격이어서 단원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협주곡 솔로 연주자도 결국 리에프로 결정되었다. 이례적인 결정이었지만 지도 교수의 판단이었고 나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리에프는 합주 외에도 홀로 남아 연습을 했는데, 꼭 나를 붙들었다.
'나 없어도 혼자 연습할 수 있잖아.'
'쿠로상이 봐주면 더 잘 돼여.'
'나도 바쁘다고.'
'피아노 곁엔 맨날 있으면서.'
차라리 샐쭉거리며 한 말이었으면 귀엽기라도 했을 텐데, 리에프는 도발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 켄마는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클라이막스에 오르기 직전에 작은 실수를 거듭했다. 저번과 같은 일이 있을까 차마 켄마에게 편의를 봐줄 순 없었고 나는 연습을 더 해오란 소리밖에 하지 못 했다. 그 연습에 당연히 늘 함께 하고 싶었지만 몇 번의 연습 뒤 켄마가 나를 거절했다.
연습 안 봐줘도 돼, 쿠로.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내겐 철벽 같은 거절로 들렸다. 그런 내 처지를 리에프에게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켄마는 너처럼 성가시게 안 굴어.'
'내가 안 그러면 섭섭한 얼굴 하고 있을 거잖아여.'
'⋯연습해라.'
그제야 리에프는 연습을 위해 활을 들었다.
*
켄마의 슬럼프 때문인지 켄마와 나의 관계는 조금 삐걱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적게 나누던 대화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섹스를 하는 횟수도 줄었다. 무엇보다 켄마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켄마는 말수가 적고 만사에 관심이 없을 뿐, 절대 냉소적이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즈음의 켄마는 사소한 일마다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켄마를 누구보다 걱정하였기에, 나는 켄마가 생각하는 안정 거리는 고려하지 못한 채 그의 영역을 침범하고 말았다.
켄마와는 아주 가끔, 다투었다. 물론 물리적인 폭력이 오가는 다툼이었다. 완력이나 체격 면에서 내가 켄마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다투는 와중에도 몸에 밴 습관처럼 자제를 했다. 나 역시 분노로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주제에 켄마에겐 말 그대로 힘을 쓰지 못 했다. 그런 내게 켄마는 더욱 분노했다. 다툼에서도 켄마는 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켄마가 전력으로 휘두르는 물건이나 날선 감정에 다치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지휘봉을 잡는 손을 다치고 말았다.
'다쳤네여.'
리에프에게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굳이 말로 옮기는 버릇이 있었다.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입밖으로 내었다. 붕대로 감은 내 손을 보고서 한 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리에프를 무시한 채 그의 개인 연습을 위해 스코어를 펼쳤다.
쿠로상은 켄마상의 애완묘임까?
빈 합주실에 리에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도 나를 그렇게 표현한 적 없었다. 스스로도 그 단어를 떠올려본 적 없다고. 나는 왼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을 녀석의 이마에 던져버렸다. 하얀 피부에는 즉시 생채기가 났다. 찔리면 찔린다고 말하면 되지! 리에프는 또 사실을 외쳤다. 내가 두 번째로 지휘봉을 던지기 전에 리에프는 제 바이올린을 두고 내빼버렸다.
다음에 리에프를 만나 꿀밤을 먹였다. 네 몸보다 소중한 악기를 두고 도망 가? 리에프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 보았다.
'쿠로상이야말로, 손이 악기나 다름없으니까 더 소중히 해여.'
처음 보는 리에프의 표정과, 내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위로였다. 켄마에게선 이런 식의 위로 받아본 적 있던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
쿠로상, 좋아해여. 알아. 엣, 어떻게여? 넌 맨날 눈에 보이는 사실만 얘기하잖아.
그렇슴까. 리에프가 작게 웃으며 키스했다. 켄마가 처음 내게 키스를 요구했던 경험과는 달리 나는 리에프와 왜 내게 키스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 덩치만 큰 녀석이 날 좋아한댄다. 내가 좋아서 키스를 해달라고 졸랐고 나는 거기에 응해주고 있어.
리에프와의 섹스 역시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켄마와의 섹스와는 너무도 달라서, 둘을 같은 섹스라 명명해야 할지조차 망설여졌다.
내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리에프는 내게 충실히 반응해준다. 어떤 때에는 리에프가 흥분해서 마구 움직이면 나도 거기에 맞춰 허리를 흔든다. 켄마와 할 때도 허리는 흔들었지만 그때와 다르게 무력감이 들지 않았다.
켄마와 섹스하는 날보다 리에프와 섹스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켄마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의 외면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결국 켄마에게 말했다.
'요즘 리에프랑 섹스하고 있어.'
'응.'
'응이라니, 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쿠로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거라니. 한 번도 그런 거 물어본 적 없잖아. 나는 그대로 켄마에게서 등을 돌려 벗어났다. 켄마에게 먼저 등을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일 거라 생각한다.
*
오케스트라에 복귀한 나는 제대로 지휘할 수 없었다. 다들 오랜만에 지휘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친 중에도 틈틈이 리에프와 연습했다. 반면에 켄마는 슬럼프를 극복한 모양인지 힘겨워하던 파트를 무리없이 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심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켄마의 미세한 불안감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켄마보다 내게 있어 고역이었다. 연습 도중에 켄마를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심지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꼴사나운 짓은 말아야 해. 켄마를 흘겨보는 눈길마다 수 만번을 되뇌여 다짐했다. 그러나 클라이막스에 오르기 직전 파트가 오면 나는 어김없이 흔들렸다.
바이올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손을 들기 전 바이올린이 내게 웃어보였다. 리에프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연주회 날이 되었다. 교내 공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공연을 앞두고 긴장하지 않는 체질이었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에 리에프가 다가왔다.
"이번에 안 틀리고 잘 끝내면 콘서트 마스터 시켜줘여."
"십 년은 일러. 그리고 상은 내가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이바군?"
"왜여, 연주하는 건 난데-."
"널 연습시킨 건 나잖아,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윽-. 그래서, 소원이라도 있슴까?"
다른 단원들은 이미 무대에 올라서 있었다. 다음은 내 차례다. 나는 입장하기 전에 리에프의 귀에 내가 바라는 소원을 속삭였다. 무대로 발을 내딛자마자 박수소리가 터져나왔기 때문에 커튼 뒤에서 리에프가 무어라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뒤이어 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소개되어 나온 리에프의 얼굴은 벌겋게 되어 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성공적이었다. 관객석에 고개 숙여 인사하는 동안 리에프가 만면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단원의 교체가 있은 뒤 곧바로 피아노 협주곡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켄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내 옆에 선 켄마는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해 보였다.
무대에 서서 지휘를 하기 전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뜨면서 켄마를 보았다. 괜찮을 것이다. 지휘봉을 치켜들었다. 곡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곧 툭하면 켄마에게 휘말렸던 파트였다. 예전에는 단순히 켄마를 의식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의식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켄마에게 내가 없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켄마가 없다고 상상해보았다. 너무 오랜 시간 서로가 원하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한 적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원하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잡지 않는 것도-
나는 피아노 협주곡에서 처음으로 내 지휘를 완벽하게 유지했다. 내 성공에 리에프가 살짝 삐끗한 소리가 들렸다. 십 년은 이르다니까, 멍청한 놈. 그래도 공연이 끝난 뒤에 난 너에게 키스를 퍼부을 것이다.
*
켄마는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출국장의 얇은 경계를 두고 켄마와 나는 마주 섰다. 켄마와 이렇게 마주보았던 적이 언제더라. 까마득한 기억을 헤아리는 내게 켄마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쿠로."
"안녕, 켄마."
켄마는 그대로 돌아섰다. 몇 발자국 떼다가, 다시 돌아서서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전에 다쳤던 내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내 손을 잡는 손길이나 입술의 감촉에서 상냥함이 잔뜩 배어나왔다. 정말 울어버릴 지도 몰라. 울상을 억누르는 나를 올려다 보며 켄마가 자그맣게 말했다.
"고마웠어."
켄마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경계 너머로 사라졌다. 출국장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도 발길을 돌렸다. 눈가를 짧게 적신 물기를 부러 닦아내지 않았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리에프의 차를 탔다. 내가 조수석에 앉자 리에프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공항 오랜만이네여. 학교에 들어간 뒤로 와본 적이 없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네. 일본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말했잖슴까, 쿠로상 지휘 아래에서 연주하고 싶어서라고."
"나를 어떻게 알고?"
운전하는 리에프의 옆모습이 웃고 있었다.
지난 겨울에 일본에 놀러왔었슴다. 지나가는 마을에서 마침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길래 보러갔었는데, 어쩌다 맨 앞줄에 앉았어여. 그리고 쿠로상이 지휘자로 나왔져. 까만 연미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여. 그리고 공연이 시작됐는데, 곡은 기억나지도 않아. 내내 쿠로상 얼굴하고 손짓만 봤어여. 그리고 결심했어여, 당신 밑에서 꼭 지휘 받고 싶다고.
"⋯그게 무슨 첫눈에 반했어요 같은 얘기야?"
"진짠데. 첫눈에 반했다기 보단, 쫓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여. 쿠로상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거든."
"난 너 기억도 안 나는데?"
"제가 받은 느낌일 뿐이니까여. 결과적으로 틀리지도 않았고."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하이바군~."
"모른 척하기 없기에요, 쿠로상. 연주회 날 저한테 고백했잖아여."
시치미를 뚝 떼었더니 운전하는 주제에 원성을 빽빽 질러댔다. 쿠로상 진짜로 좋아한단 말이에요, 같은 볼멘소리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뻔한 사실이라고 해서 암묵에 담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 내어 말해야 알 수 있다는 것을, 너를 통해 알았다. 투정부리는 리에프의 뺨이 살짝 달아오른 것을 보고 나는 너를 닮아가기로 결심한다. 네가 나를 보고 쫓아오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좋아해, 리에프."
그리고는 누구보다 행복한 듯 활짝 웃는 너의 미소에 나도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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