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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디

[다이쿠로다이] 오래된 연인의 초상






프롬프터의 커서가 깜빡거리며 점멸한다. 너른 부스에는 캐치한 자동차 광고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벌써 오늘 세 번째 듣는 멜로디였고, 어느새 익숙해진 쿠로오는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눈은 프롬프터를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다. 그는 집에 사둔 음식 재료가 있는지, 혹은 가는 길에 무엇을 사가야 할 지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하는 거의 기계적인 연상에 가까우므로 사실 의식적인 생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저 반사적인 습관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하자면 쿠로오 테츠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백지장처럼 단순하고 명료해 보이는 상태이지만 실은 여러 층위의 작용으로 설계된 복잡한 경지이다. 쿠로오가 3분 남짓의 광고 시간, 그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휴식 시간에 무위의 경지에 들어가버린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직장 생활에 심각한 권태를 느끼고 있다던가 하는 것이다. 쿠로오 테츠로는 뉴스워치 9의 메인 앵커이다, 이 짧은 문장은 타인에게 그에 대한 많은 것을 소개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15년이 넘어가는 직장 생활에 대한 권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거나 어딘가로 훌쩍 떠난다거나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것은 굳이 직종을 따지지 않더라도 그만한 연차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이다. 그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문제였다. 쿠로오의 권태에는 그에게만 해당하는 결핍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그것은 일반적인 직장인의 권태와 체감상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는 그 결핍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내지 못 했다. '생각이 없다'는 상태는 머릿속의 모든 하잘것없는 고민거리들까지 거부하는 것이므로 권태의 근원인 결핍과 그 정체를 찾는 일 같은 것은 더더욱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쿠로오가 사고의 파편들을 멜로디로 밀어내고 있을 때, 카메라 감독이 프롬프터 옆에서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그제서야 쿠로오의 초점이 자리를 잡아 머무른다. 프롬프터의 빈 커서는 이제 짤막한 증권 증시 정보를 가리키고 있었다. 꺼졌던 부분 조명이 다시 돌아오고 손가락이 한 개씩 접힌다. 3, 2, 1. 사고의 강제 집행이다. 그의 표정은 막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마냥 능청스럽고 태연하다. 테이프를 돌려 광고로 끊기기 전의 영상과 이어 붙인다 해도 누구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테다. 그는 공동 앵커와 함께 만담을 주고 받듯 프롬프터의 글자를 읽는다. 글자가 막바지에 이르러 커서는 다시 빈 칸에서 점멸한다. 기울었던 몸이 유연하게 땅을 짚는 것으로 가볍게 돌아 카메라 정면을 응시했다.


  "뉴스워치 9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지겹게 들었던 엔딩 테마곡이 흐르고 프롬프터는 검정색의 빈 화면이 되었다. 생각은 다시 멈추었다가,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행방에 물음표를 달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누군가'는 예상했던 대로 흡연실에 있었다. 예상 외인 것은 그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뉴스 7의 메인 앵커이자 보도국의 최연장자인 타카하시의 언성이 폐쇄된 흡연실 바깥까지 들려왔다. 분명 그 누군가가 혼나고 있는 모양새이다. 구체적인 사정이야 나름으로 있겠지만 구태여 흡연실 벽에 귀를 바짝 갖다대지 않아도 쿠로오는 언쟁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쿠로오는 잠자코 타카하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흡연실을 나오자 허리를 구십 도로 꺾어 세상에서 가장 예의 바르게, 역설적이게도 가장 존경을 취하지 않은 태도로 인사를 했다. 타카하시는 구십 도라는 숫자에 만족했는지 쿠로오의 반듯하게 꺾인 허리를 보고는 곧장 제 갈 길을 떠나버렸다. 안에는 역시나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 타카하시의 담당 프로듀서, 사와무라 다이치가 있었다.


  "타카 상이랑 이제 그만 싸우는 게~?"

  "싸우는 거 아니래도."

  "그래, 그럼 이제 다이치가 그만 고집 부리는게~?"


  사와무라는 대답 대신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도 한 대만. 니 꺼 피워. 아까 들어가기 전에 다 피웠어. 너 진짜 앞으로 빌려간 담배 달아둘 거야. 이제부터? 이미 늦었네요~. 지금부터 달아도 너한테서 백 갑은 받을 수 있어. 와, 사와무라 군 쪼잔해.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둘 다 첫 모금을 들이키고 내쉰 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고단함을 넘어선 서로의 탈력감에 대한 암묵적인 위로였다. 쿠로오는 건물 바깥으로 난 흡연실 창문 턱에 기대어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꽉 막힌 건너편의 빌딩을 보았다. 그 시야 속에서 그는 또다시 사념을 밀어내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는데, 사와무라의 푸념이 끼어들었다.


  "진짜 안 맞아. 반드시 갈아치우고 말 거야."

  "위험발언이시네요."

  "할 말은 해야지. 엔딩 멘트에 사견 넣는 게 뭐가 그렇게 나빠?"

  "네가 좀 물러나. 어차피 그 사람 5년 내로 은퇴할 생각 없고, 국장도 그 사람 편인데 다이치가 하고 싶은 대로 될 리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 이 녀석은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각자는 서로의 지난 '원래 이런' 모습들을 돌이켜 보았다. 쿠로오의 회상은 추종이었다. 예전부터, 자신과 알고 지낼 때부터, 자신이 알지 못했던 때부터,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올곧았던 사와무라는 항상 제 주관이 뚜렷했고 추진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이에게 제 포부를 반복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은 본인에게 일종의 주문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과 더불어 주위의 타인을 감화시키는 부작용side effect을 가져왔다. 사와무라, 혹은 쿠로오의 삶의 대부분에서 그 피해자는 늘 쿠로오였다. 반복해서 휩쓸리자 어느 순간부터는 쿠로오 스스로도 이것을 자각하고 경각심을 품고 있었으나 얄팍한 경각심 따위에 비견할 수 없는 마음이 언제나 그것을 꺾어버렸다. 쿠로오는 지금 이루어진 삶에 특별히 불만은 없었기 때문에 피해자 의식 같은 자의식 과잉은 갖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중요한 분기점마다 사와무라의 계획을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 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몇 번째였던가 알 수 없는 추종을 떠올렸다. 뉴스 7의 프로듀서가 될 거야. 입사도 하기 전의 사와무라가 말했다. 아직 원서 쓰는 주제에 멀리 나가지 마. 그렇게 대꾸했지만 쿠로오는 내심 사와무라의 말이 언젠가 현실이 되리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야망이 현실이 되던 몇 해 전의 어느 날, 사와무라가 허겁지겁 들고 달려온 소식에도 미지근한 반응 밖에 해줄 수 없었다. 드디어 이루어진 꿈 덕에 바쁜 나날을 보내어 사와무라의 다음 목표는 아직 구체화되어 나오진 않았지만 쿠로오는 역시 이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이 방송국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면 더 높은 자리를 향해 올라가고자 하는 상승 욕구의 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직장에 있게 된 이상 쿠로오에게 더 이상의 추종은 없을 지도 모른다. 쿠로오는 그렇게 예측해 보았다.


  "오늘 별 일 없었지?"

  "맨날 똑같지 뭐. 네가 잘하니까 니시자와가 할 일이 거의 없어."

  "그런 말 말라니까."

  "진짠데. 다들 감사해 하고 있어."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다. 프롬프터에 띄우는 스크립트를 제 손으로 쓰기는 하지만 메인 뉴스인 뉴스 7의 앵글에서 크게 벗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내용에서 거의 차이는 없고 겨우 1, 2시간 내에 새로이 업데이트 되거나 발생한 사건을 덧붙이는 정도였다. 이것이 권태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역시 보편적인 것이고, 여기에도 불만은 없다. 쿠로오는 반복적인 일에 익숙하고 또 능숙하기도 했다. 잠들기 전의 시간대라는 것도 제게 잘 맞았다. 쿠로오의 결핍은 그가 맡은 업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담배 한 개비 씩을 다 태우는 동안 다시 말이 없었다. 좀처럼 줄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와무라는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은 모양인지 조급한 손짓으로 다음 개비를 꺼내어 물었다. 보기만 해도 입이 썼다. 쿠로오는 외상을 요구하는 대신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뜨는 동작을 반복했다.


  "너는 어때?"

  "나? 나도 땡큐지."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드물게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없어 쿠로오는 깜빡거리는 동작을 멈추고 사와무라에게로 시선을 돌려 고정했다. 그는 매우 당돌하고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쿠로오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언제 여기로 올 거냐고."

  "어?"

  "나랑 맞출 사람 너뿐이잖아. 국장한테 슬슬 언질 띄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사와무라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몽둥이로 있는 힘껏 쿠로오의 뒤통수를 갈긴 것과 다름없었다. 둘의 성격은 극과 극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상이했지만 같은 상황, 같은 시점에 놓일 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사실을 둘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사와무라는 방금을 그 타이밍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쿠로오는 그것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어디서부터 놓쳤다고 해야 좋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얼빠지고 멍한 얼굴로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언제 말할 건데?"

  "⋯⋯."

  "테츠로?"


  쿠로오는 생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래, 사와무라는 정말 원래 이런 녀석이다. 저와 잡은 손을 믿고 제가 옆에 있을 거라 믿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같은 곳을 향해 간다고 또 믿는 그런 녀석이다. 쿠로오의 현실은 그 믿음과 달랐다. 손은 언제든 그가 놓으려 하면 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걸음은 항상 반 걸음 뒤에, 동시에 같은 곳을 보는 게 아니라 사와무라가 가리킨 곳을 뒤따라 좇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와무라가 굳게 믿고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는 것이 가능했다. 쿠로오도 그 믿음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아니, 배신할 수 없도록 사와무라가 만들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동력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으로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 그 정체를 명확하게 밝혀내려 한 적은 없었다. 네가 늘 먼저 말해주었기 때문에- 이제 와 그것을 통렬히 절감한다. 결핍은 이곳에 있으며 또 이곳에 있음으로써 해소된다.


  쿠로오는 사와무라의 손에 걸린 담배를 빼앗아 끄고는 그에게 어깨동무를 걸치고 흡연실을 나섰다. 사와무라가 무어라 반박할 틈도 주지 않았다.


  "재촉하지 마. 금방 얘기할 테니까."

  "정말이지? 근데 내 담배는 갑자기 왜 끄고 나와?"

  "나 배고파. 집에 가서 얼른 밥이나 먹자."


  그의 말에 사와무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에 아무 것도 없던데 콘비니 들를까 콘비니는 제발 사양이니 포장 라멘이나 사가자는 대화 따위를 나누며 둘은 방송국을 나와, 자정을 향해가는 밤중을 걸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자동차 광고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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