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에 잠에서 깨는 날이면 다른 날보다 조금 분주해졌다. 목에 걸친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던 곡은 진작 멈추어있었고 스코어는 책상과 바닥에 흩어져 있다. 흩어진 스코어와 바닥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지휘봉을 서둘러 챙겨 원룸을 나선다. 합주실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학교 근처 게임센터에서 켄마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의실 두 개 넓이의 게임센터에서 키가 작고 요상한 푸딩 머리를 한 남자애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뭐. 나는 켄마 뒤에 서서 그가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끝나갈 때쯤 한 마디를 건넨다.
'켄마, 연습 가자.'
그러면 켄마는 꼭 타이밍 알맞게 게임을 끝내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합주실로 가는 길에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눈다.
켄마, 악보 챙겼어? 응. 연습은 좀 했고? 뭐⋯, 그럭저럭. 대답이 그게 뭐야. 그러는 쿠로야말로 잠을 못 잔 것 같네. 그래? 잘 만큼 잤는데.
그리고 합주실에 와 켄마가 펼치는 악보를 보면 켄마의 '그럭저럭'이라는 대답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악보에는 켄마나 나 정도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들이 아주 간간이 적혀 있었는데 정말 최소한의 것이었다. 열심히 연습한 사람의 악보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나는 더 군소리 않고 합주 연습을 시작한다.
켄마는 나의 소꿉친구이자 우리 학교에서 수재로 유명한 피아노과 2학년생이다. 켄마에 대한 수식어는 어릴 적부터 주변인들에 의해 그렇게 즐겨 붙여져 왔다. 천재라 불릴 정도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범재들보다는 두드러진 재능을 가졌다는 느낌으로, 수재라고 불렸다. 켄마는 확실히 악보를 읽는 능력이나 습득력이 빠르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남들 말마따나 수재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상의 특별한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분명히 천재의 재능을 발휘할 텐데. 켄마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볼 때면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하였다. 연습하지 않고도, 혹은 적은 연습으로도 재능을 발휘하는 게 천재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켄마에게 천재라는 타이틀을 얻을 만한 잠재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켄마가 그런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릴 적 켄마가 피아노를 치면 나는 내가 공부한 악보들을 켄마에게 쳐보라며 가져다주거나 옆에서 기본적인 곡들을 따라했었다. 내가 지휘하는 곡에 켄마가 피아노를 쳤으면 좋겠어. 그 말을 했던 것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였던 것 같다. 켄마와 나는 한 학년 차이가 났고, 내가 먼저 진급한 사이 켄마가 피아노를 그만두어 버릴까 그를 다급하게 붙들며 한 말이었다. 실은 켄마가 연주하는 피아노 곡을 내가 지휘하고 싶어, 가 본심이었다. 그 말이 도화선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켄마는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고 대학까지 함께 오게 되었다.
켄마의 심드렁한 태도와는 반대로 나는 지휘하는 것을 좋아한다. 스코어를 분석해 여러 가지 악기의 소리를 한 데 모으는 것은 나의 순수한 즐거움이다. 어떤 곡이든 누구의 연주이든 그것을 지휘하는 것은 즐겁지만 그 중에서 켄마의 피아노를 지휘한다는 것은 나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특별했다. 켄마의 연주를 지휘할 때에는 켄마와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물론 켄마와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해온 내가 그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 것보다는 평소 의중을 알 수 없는 켄마의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켄마의 연주를 내가 지휘할 때면 그에게 빠져드는 것과 동시에 작은 입자가 되어 그의 내부를 탐험하는 것 같은 환상이 들곤 한다.
문제는 그게 여럿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합주에서도 불쑥 티가 나는 것이었다. 곡의 초중반부에는 나도 지휘 자체에 온 집중을 쏟아붓고 있기 때문에 말려들지 않지만, 협주곡에서 피아노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를 때면 버릇처럼 삐끗, 내가 켄마의 연주에 이끌려가고 만다. 내 지휘에 켄마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켄마가 건반을 질주하는 대로 나도 모르게 따라가버리는 것이다. 그게 지휘자로서 얼마나 꼴불견인 줄 알면서도 가끔 나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 했다. 그것은 켄마와 나의 관계를 대변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날의 연습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 마이너, Op. 18 1악장. 키만큼 손이 상대적으로 작은 켄마가 어떤 파트를 치기 고되어 하는지 나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파트가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켄마의 페이스에 맞춰버리고 말았다. 금세 내가 지휘하는 페이스로 돌아왔고 아주 순간이었지만, 켄마가 나의 쓸데없는 배려를 눈치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켄마가 퉁기는 건반에서 불쾌함이 묻어나왔다.
합주실이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동안 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화났겠지, 분명. 켄마의 피아노에 내가 끌려가는 건 보통 클라이막스에서 나도 모르게 곡에 빠져드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번 것은 켄마를 업신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켄마에게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이따 저녁에 쿠로도 가지? 합주 술자리를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대답했다. 응, 켄마도 가려고? 쿠로가 간다면. 술자리에 도통 끼질 않는 켄마인데 의외였다. 웬일이야? 그럼 더 가야지. 나의 말에 켄마가 살풋 웃었다.
'가기 전에 내 방에 들렀다 같이 가.'
그제서야 나는 방금 일어난 대화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켄마는 화가 났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켄마가 주는 벌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빈 합주실 피아노 위에서 후배위로 하거나 지휘봉으로 안을 휘저어질 때도 많았고, 어떤 벌이 되었건 켄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절대 사정 봐주지 않는 쪽이었다. 켄마의 기분이 틀어지는 일은 종종 생기곤 했는데 그다지 일관성은 없다. 패턴을 발견하지 못해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고 때문에 왜, 언제 벌을 받는지 예측 불가능하다.
술자리에 앉았지만 자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애널 바로 안쪽에서는 술자리에 오기 전 켄마의 자취방에서 넣은 두 개의 달걀형 바이브레이터가 서로 진동하며 맞부딪치는 중이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오해 받을 수 있는 상태라 다행이었지만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화장실로 향했다. 내 동선을 좇는 켄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빈 칸막이에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잠그려는 순간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와 저지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이브레이터가 안에서 마구잡이로 요동쳤다.
'힉-...!'
'쉿. 큰 소리 내면 안 돼, 쿠로.'
켄마가 들어와 등 뒤의 걸쇠를 걸었다. 갑자기 거세진 진동에 결국 다리 힘이 풀려 주저 앉으려는 것을 그가 붙들었다. 등골에서 흐르던 식은땀이 온몸에서 나기 시작하고 내 몸인데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이 마구 났다.
'켄, 마- 아흣...! 그만, 응, 응, 꺼줘-'
'여기 들어와서 멋대로 빼려고 했어?'
'아니, 아냐, 절대- 히익..! 제발, 제발 그, 거 꺼...!'
나는 어느새 켄마에게 매달려 엉엉 울고 있었다.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였다. 켄마가 스위치를 내렸다. 내벽을 헤짚던 진동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지만 아랫배의 묵직함이 전신을 지배해버렸다. 당장 내 안에 있는 장난감 따위는 빼버리고 욕정에 펄떡거리는 켄마의 날것이 쑤셔줬으면 좋겠다는 욕구 뿐이었다. 나는 간절하게 켄마를 올려다 보았다. 켄마의 얇은 눈동자가 어두운 조명 속에서 빛났다.
켄마의 자취방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섹스를 했다. 켄마는 작정하고 벌을 주려는 듯 갖고 있는 장난감들로 내 몸이 버티는 한 괴롭혀댔다. 모두 처음 사용하는 것이었고 이게 몸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것도 있었지만 켄마가 넣으라고 하면 넣었고 핥으라고 한 것은 핥았다. 나는 켄마에게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저항적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켄마가 나를 따르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한 번도 켄마와 이렇게 되리라 생각해본 적 없다. 켄마와의 관계는 항상 그랬다. 생각하거나 혹은 예상한 대로 된 적이 없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되었을 뿐이다.
'쿠로, 이리 와.'
그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정신을 차리면 나는 어째선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처음 켄마와 섹스할 때에도 나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켄마에게 깔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엉덩이 들어, 쿠로.'
'어라, 켄마 네가 넣는 거야?'
'응.'
그 말에 가타부타 토를 달지 못 했다. 나는 순순히 엉덩이를 치켜들었었다. 곧이어 켄마의 페니스가 내 애널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요철이 맞는 합일감과 충족감을 느꼈다. 꼭 발정난 고양이 같네. 뒤에서 내 안으로 찔러넣으며 켄마가 조용히 말했다. 켄마의 말 대로였다. 내 페니스는 켄마가 넣는 순간부터 쉼 없이 정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켄마가 내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나는 죽을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무엇이 왜 이렇게나 좋은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켄마가 내 안에 있다는 게, 그리고 가끔은 욕정 섞인 켄마의 달뜬 숨이 내 목덜미에 닿는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내 지휘봉이 켄마의 연주에 멋대로 박자를 맞추게 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생각해본 적 있지만 그럴 마음은 없다. 나는 만족한다, 켄마의 애완묘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오케스트라 연주회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켄마의 피아노 협주곡 외에도 바이올린 협주곡이 필요해 곡 선정을 위해 조금 일찍 합주실을 찾았다. 합주실은 텅 비어 있었다. 집에서 가져 온 CD를 넣어 스피커에 연결해놓고 관객석에 가서 앉았다. 전날에도 켄마와 조금 고된 섹스를 했기에 자리에 앉을 때 허리가 불편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 메이저, Op. 61. 스코어를 펼쳐놓은 준비까지 마친 다음 리모콘을 이용해 재생시켰다. 팀파니와 관악기가 포문을 여는 것으로 곡이 시작되었다. 바이올린 독주 파트가 나오기 직전에 눈을 감고 몰입하려던 참이었다.
합주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불청객의 침입에 눈을 떴다.
그리고 바이올린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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