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뉴욕, 낡아빠진 데다 인적이 드문 어느 펍 앞에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섰다. 운전석에서 기사가 먼저 내리더니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짙은 썬팅이 된 차의 문 뒤로 40대 중반에 백발이 섞인 갈색 머리를 한 백인 남자가 정장 자켓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보도에 발을 디뎠다. 남자는 때가 잔뜩 끼어 본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보도를 구두코로 두어 번 긁었다. 손에는 지포 라이터처럼 생긴 무언가를 꼭 쥔 채 남자는 기사를 두고 펍의 문을 열었다. 바 안쪽에서 느릿하게 유리잔들을 닦고 있던 펍의 주인은 흔한 인사도 건네지 않고 남자를 한 번 흘겨보기만 했다. 남자는 무관심한 주인의 응대에도 아랑곳 않고 오로지 한 자리만을 바라보고 어둑한 조명 아래를 걸어갔다. 그가 거두절미하고 앉은 자리에는 이미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Mr. Black?"
남자의 물음에 검은색 페도라를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쿠로오 테츠로는 챙 끝을 살짝 올려 상대를 확인했다. 쿠로오는 의자에 완전히 기대었던 몸을 살짝 고쳐 세웠다.
"Mr. Moore! 시간에 딱 맞춰 오셨군요."
"원하는 자료는 말한 대로 가져왔소."
남자는 손에 꽉 쥐고 있던 지포 라이터, 실은 공공기관의 기밀 문서가 든 2테라에 해당하는 usb를 보여주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발치에 있던 검은색 직사각형의 브리프 케이스를 내밀었다. 바닥에 쌓인 먼지가 일며 둔탁하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약속한 20만 달러입니다. 당신이 그 usb를 내게 건네주면, 이 돈은 당신 겁니다."
"⋯⋯."
"우린 의뢰품 확인 절차가 꽤 까다로운 편이지만 일단 믿고 받아두는 겁니다. 만일 usb 안에 있는 내용이 가짜거나 당신이 속임수를 썼을 경우 이 돈을 쓸 새도 없이 지옥으로 떠나야 하는 건 알고 있지요?"
"그, 그럴 리가! 지금 당장 확인해보아도 좋소!"
당황해하는 남자의 눈에 진정 공포가 비친 것을 보고 쿠로오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 다소 몸을 남자에게 밀착시킨 뒤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이제 군말 말고 서로 거래를 끝내자는 묵언의 제스쳐였다. 남자는 쿠로오의 손과 자신의 손을 한참 번갈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내내의 의중을 꺼내들었다.
"회사에서의 내 지위가 안전하다는 보장과 함께, 5만 달러를 더 주시오."
"호오?"
"아무래도 내 쪽이 위험부담이 훨씬 큰 것 같소. 이건 공정한 거래가 아니오."
남자를 바라보는 쿠로오의 눈빛이 바뀌었다. 쿠로오의 입가에 걸렸던 만족의 미소는 곧 비소로 변했다. 남자가 쿠로오의 변화를 감지하고 주춤하자 쿠로오는 단호하게 그와 어깨를 밀착해 한쪽 팔로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우리와의 거래에 '공정'이란 건 없어요, Mr. Moore."
"이, 이거 놓으시오!"
"난 귀찮은 건 싫어해서 말입니다. 한숨 주무세요."
자켓 안쪽에 있던 쿠로오의 다른 손에는 어느새 소음기를 단 권총이 들려 있었다. 남자가 그것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쿠로오는 정확히 남자의 명치와 옆구리에 두 개의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는 약간의 들썩이는 소음만 일었다. 쿠로오는 다시 권총을 자켓 안에 넣고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usb를 빼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고는 조용히 일어나 테이블 밑에 있던 브리프 케이스를 챙겨들고는 펍을 빠져나왔다. 쿠로오가 펍을 나선 뒤 5분 후에 펍 안에 비명이 울려퍼지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 했다.
일을 완수하고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거리를 걷는 쿠로오의 표정은 좋지 만은 않았다. 애초의 거래에 순순히 응했으면 좋았을 것을. 쿠로오는 남자의 어리석은 욕심을 질책하며 몇 번이나 곱씹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자신의 일이라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 살인까지 저지르는 것은 그에게도 찜찜한 일이다. 쿠로오는 최근 들어 그 켕기는 기분을 전에 없이 더욱 자주 느끼고 있었다. 계기랄 것은 특별히 없다. 다만 스스로의 기계적인 냉정함에 조금 피로를 느낄 뿐이었다.
이제 20만 달러를 제 상사에게 돌려주고 보고를 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야 했다. 쿠로오는 그토록 자주 찾았던 상사의 사무실이 어디였는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아 뉴욕 한복판에 멈추어 섰다. 돌연 미아가 된 기분에 쿠로오는 가만히 선 채로 해를 올려다 보았다. 직사광선이 시력을 빼앗을 듯 찔러 들어와 시야에 장막을 드리웠다. 쿠로오는 품 안에 있던 선글라스를 썼다. 여전히 시야는 어둠 속이었다.
*
쿠로오는 간판 하나 걸려있지 않은 사무실의 통로를 지나 역시 문패 따위 없는 밋밋한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근처 마트에서 싸구려 장식이라도 하나 사서 걸지. 하지만 매해 보았듯이, 아카아시의 사무실은 크리스마스에도, 연말연시에도, 언제나 썰렁할 것이라는 것을 쿠로오는 너무도 잘 알았다. 쿠로오는 작은 한숨을 쉬고는 노크를 했다. 안에서 작은 대답이 들리기까지 쿠로오는 착실히 문 앞에서 대기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실 내부는 외부와 마찬가지로 썰렁했다. 사무실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물품만 놓여 있고 벽지와 바닥은 새하얀 무결성을 자랑하려다 방문자를 고려해 절충한 듯한 상아색으로, 아카아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 삭막함에 숨 쉴 틈이라도 찾겠다는 듯 창가로 익숙하게 걸어가 걸터 앉았다. 서류에 온통 시선을 쏟고 있던 아카아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창가가 마음에 드나 보죠? 요즘 그곳에만 앉네요."
"딱히. 여기가 바람이 제일 잘 들어서 그래."
쿠로오는 창문을 살짝 밀어 통풍구멍을 만들었다. 아카아시는 그의 모습이 커다란 고양이가 노닥거리는 모양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보고를 받아볼까요?"
"너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제가 아는 것과 보고를 받는 것은 별개죠. 쿠로오상이야말로 잘 아시잖아요?"
쿠로오는 잔뜩 불만스러운 인상을 썼다가 군말 없이 자켓 안에 넣어뒀던 usb를 꺼내 아카아시에게 던져 건넸다. 의뢰품은 좀 더 소중히 다뤄주세요, 하고 아카아시가 핀잔을 주었지만 쿠로오는 회수한 브리프 케이스도 대충 발로 밀쳐 대놓고 못 들은 척 했다.
아카아시가 책상 위에 있는 버저의 버튼을 누르자 바깥 사무실에 있던 조직원 중 한 명이 들어왔다. 아카아시는 그에게 usb와 브리프 케이스를 건네고는 짧은 지시를 내렸다. 그것으로 쿠로오가 맡은 프로젝트는 일단락되었다. usb에 담겨 있는 자료가 잘못 되었거나 할 경우 추가 프로젝트가 주어지겠지만, 쿠로오가 조직에 몸 담은 오랜 세월 동안 그에게 나머지 숙제가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 됐군요."
"뭐가?"
"The Delivery Man. 별로 죽이고 싶지 않았잖아요."
"...뉴스 봤어?"
"봤죠, 쿠로오상 얼굴에 써 있는 뉴스."
아카아시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던지는 농에 쿠로오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카아시와는 오랜 시간 함께 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간혹 일방적으로 훤히 속을 보여준다는 기분이 들어 꺼림칙해진다. 쿠로오는 아카아시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지만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뒷걸음질하는 것조차 허용치 않았다. 지금도 당장 이 사무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지만 아카아시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사이기 때문에, 쿠로오는 불복종의 충동을 억누를 뿐이었다.
"다음 일이나 말해줘."
"그러죠."
이럴 때 얄미울 정도로 유려하다는 점도 쿠로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는 단순히 아카아시의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쿠로오의 마음에 자꾸 덜컥하고 발이 걸리는 장애물 같은 것이 되었다.
"이번 일은 좀 특별합니다."
아카아시는 책상 위에 있던 평범한 서류 봉투에서 여러 다발의 서류와 소형 usb를 꺼내 올려두었다. 쿠로오가 다가가서 보니 어느 남자에 대한 프로파일과 프로젝트에 관한 계획서 따위였다. 가장 위에 있는 서류에는 남자의 사진도 함께 붙어 있었다. 녹색 눈동자에, 은발. 사진 옆에 있는 특기 항목에는 '저격'이 적혀 있었다. 나이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특기가 저격인 일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 보였다.
"신입이야?"
"아뇨, 용병입니다. 매우 우수한 저격수로, 주로 러시아와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최근에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이번에 쿠로오상이 맡을 일은 두 가지 입니다. 첫 째는 이 자와 함께 프로젝트를 완벽히 수행하는 것. 단, 이번 프로젝트는 상당히 까다로워요. 의뢰인이 반드시 정해진 날짜와 장소, 시간에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타겟의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했을 때 우리 쪽 리스크도 만만치 않습니다. 보수는 그만큼 받을 겁니다."
"두 번째는?"
아카아시가 저격수의 프로파일을 쿠로오 앞으로 한 발 더 내밀었다.
"두 번째는, 이 자와 함께 일하면서 그를 우리 쪽으로 스카웃하는 일입니다."
스카웃. 쿠로오는 다소 생경한 그 단어를 되새김질 해보았다. 스카웃을 전담하는 요원들은 따로 있다. 그들은 회유의 전문가이다. 쿠로오는 스카웃 전담 요원이 아닌 행동 요원이지만 협상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타겟의 처리만을 요하는 프로젝트보다 의뢰품이나 타겟과의 협상이 걸린 프로젝트를 쿠로오가 조직 내에서 가장 많이 맡았던 것도 그 탓이었다. 조직 내에 타겟의 숨통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요원들은 많지만 쿠로오가 그 중에서도 확고부동한 최우수 요원의 자리를 차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동업자의 스카웃을 임무로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쿠로오는 프로파일을 좀 더 자세히 읽기 위해 그 서류를 손에 들었다.
"하이바...레브?"
"리에프, 러시아어로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혼혈이에요."
쿠로오가 하이바 리에프의 프로파일을 훑어보는 동안 아카아시는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들을 내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프로젝트는 난도가 높아요. 타겟은 정부 고위관료로 스페셜 A급, 저격으로 처리하지만 범행은 다른 이가 저지른 것으로 덮어 씌울겁니다. 누명을 쓸 사람도 정해져 있으니 자료를 확인하면 됩니다. 반드시 그 사람 소행으로 보이게 해야 하며 실패할 시에 뒤따를 플랜 B나 프로젝트 수행 중 처리해도 되거나 처리하면 안 될 인물들 리스트도 함께 들어 있어요."
"기한은?"
"한 달. 그동안 하이바 리에프와 동거하면서 진행하게 될 겁니다."
쿠로오는 이전에도 다른 요원들과 동거하면서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었지만 대개 1주 내에 끝이 나는 간단한 프로젝트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쿠로오가 맡았던 어떤 것보다 까다로운 프로젝트인만큼 한 달의 시간은 빡빡하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타인과 동거하며 지내기에는 조금 긴 시간이다. 게다가 쿠로오의 취향을 생각한다면 더욱 길고 힘든 시간이 된다.
쿠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은 마련해놨겠지? 키 내 놔."
"아, 쿠로오상 아파트가 아지트입니다. 어쩌다보니 그곳이 적소더라구요. Mr. 하이바와는 지금 가서 만나면 됩니다. 쿠로오상이 자주 가는 커피숍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뒀어요. 그는 쿠로오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먼저 다가가야 할 거예요."
"프라이버시 침해와 노동착취, 노조에 항의할 거야."
"새삼. 프로파일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Mr. 하이바에게는 재밌는 특징이 있으니 그것도 잘 찾아보세요."
여느 때와 변함 없는 무표정이지만 아카아시는 다소 즐거워하고 있다. 쿠로오에게는 아카아시의 즐거움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기분을 공유하고 싶진 않아 아카아시의 책상 위에 벌려진 서류더미들 속에서 usb를 찾아낸 뒤 재빨리 사무실을 나설 태세를 취했다.
마악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쿠로오를 아카아시가 불러 세웠다.
"Mr. 하이바는 영입대상이긴 하지만 협상 타겟에 대한 프로토콜과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아시죠?"
"알아."
"기한 내에 우리 쪽에 들어오지 않을 경우,"
"⋯⋯."
"처리하세요."
"...안다니까."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마지막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별 수 없었다. 규율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이 쿠로오의 자율 신경을 지배했고, 아카아시의 말이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문고리를 돌릴 수 있었다. 쿠로오는 건물의 복도가 진창인 것처럼, 그리고 그 진창 속을 맨몸으로 헤치듯 걸어나왔다. 겨우 바깥의 햇살이 보였다. 그러나 조직의 건물을 나선 후인데도 여전히 진창에 빠져 있는 듯 다리에 힘겨운 감각이 남아 있었다.
*
킬러의 외양에 대한 특별한 규칙은 없다. 그러나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이 주된 일인 만큼 그들은 자연스레 화려한 복장이나 튀는 행동을 지양하게 되었다. 쿠로오는 원체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애착이 갈 만한 장소나 사람과의 관계 같은 것도 최대한 만들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나마 자주 찾는 곳이 있다면 아파트 근처의 작은 커피숍이었다. 프로젝트가 없는 아침에는 늘 그곳으로 커피를 마시러 나왔고 카페 주인도 그를 단골로 대했다. 늘 편안한 걸음으로 찾았던 카페지만 쿠로오는 지금 선뜻 들어서지 못 하고 멀찌감치에서 카페 내부를 지켜보았다.
카페 안에는 프로파일에서 보았던 은발의 사내, 하이바 리에프가 앉아 있었다. 리에프는 그 나이 또래가 입을 법한 매우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장신에 은발이 눈에 띄긴 하지만 온갖 종류의 패션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이는 뉴욕에서라면 그리 튀는 외모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쿠로오는 프로파일 없이도 그를 동류로 직감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멀리 있는데도 리에프에게서는 어린 살인자 특유의 절제되지 못한 원기가 넘쳐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리에프의 행색 어느 한 군데도 그가 킬러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쿠로오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쿠로오 본인도 그것을 동업자의 감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리에프는 카페에 누가 들어올 때마다 그 사람을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짐작한 쿠로오는 마지 못해 카페로 발걸음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출입문 맞은편에 앉은 리에프와 쿠로오의 눈이 마주쳤다. 반짝, 하고 눈동자에 점화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쿠로오가 카페 입구에서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리에프가 벌떡 일어나더니 쿠로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신이 Black Panthera죠?"
"네가 그 새끼 사자?"
"새끼라니, 너무하시네. 아무튼 반가워여."
리에프가 뜻밖의 마중을 나오는 바람에 카페에 있기 애매해져 결국 쿠로오의 아파트로 바로 이동하기로 했다. 리에프의 손에는 그의 무릎까지 오는 캐리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짐은 그게 전부였다. 지척에 있는 쿠로오의 아파트까지 걸어가면서 리에프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일본 이름은 쿠로오? 였던가여?"
"맞아."
"'쿠로'는 검다는 뜻이죠? 그래서 다들 Mr. Black이라고 부르는구나. 그럼 쿠로상이라고 불러도 돼여? 아니면 Black Panthera라고 부르는 게 더 좋슴까?"
"후자가 더 좋지만 상관 없어."
"Black Panthera는 너무 기니까 쿠로상이라고 부를 게여. 근데 그 코드네임 좀 민망하지 않슴까?"
"난 그런 거 좋아해."
"헤- 의외네여, 쿠로상. 어쨌든 잘 어울려여."
이제까지 일본식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같은 일본인 출신의 아카아시 밖에 없어 쿠로오는 리에프가 부르는 자신의 애칭이 조금 생소했다. 보통내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301호라고 쓰여진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퀴퀴한 건물 외관과는 달리 다소 고급스러운 실내가 드러났다. 리에프는 아파트 안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실내를 한 번 둘러보더니 제법 전문가용으로 맞추어진 부엌에 가서 이것저것 만져보기 시작했다.
"쿠로상, 요리 잘 해여?"
"아니. 부엌은 거의 쓴 적 없어. 인테리어 하면서 그냥 한 건데, 쓸 일이 없더라고."
"엑, 그럴 수가. 이렇게 멋진 부엌인데! 그럼 제가 좀 써도 됨까?"
리에프의 눈이 카페에 들어선 쿠로오를 발견했을 때처럼 빛나고 있었다.
"넌 요리 잘 해?"
"전 특기가 요리임다!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제가 만든 요리는 진짜 맛있다구여."
특기는 저격 아니었어? 비틀린 말투로 묻고 싶었지만 취사도구들을 들춰보며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두고 쿠로오는 할 말을 잃었다. 나이가 어리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일 줄은 몰랐다.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쿠로오가 물었다.
"카페에서 나는 어떻게 알아봤지? 우리 쪽에서 내 정보를 안 준 걸로 알고 있는데."
"어-, 딱 알겠던 걸여. 쿠로상이 가장 선명했슴다."
"...선명? 너도 그거냐, 동업자의 감 같은 거?"
"에? 그게 뭐져, 동업자의 감이란 게?"
쿠로오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스스로도 제대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 없다. 리에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다시 부엌을 살펴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다른 요원과 동거하며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지만 첫만남이 이렇게 스스럼 없었던 적은 전무했다. 킬러는 본능적으로 모든 것에 경계심을 갖고 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리에프에게서 자신을 향한 그런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이가 동업자의 감 따위를 알 리 만무할 것이다.
리에프가 너무나 쉽게 거리를 좁혀 온 탓에 상대와의 거리 두기에 능란한 쿠로오는 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연한 상태가 되었다. 상대는 어리지만 자칫 방심해서 주도권을 빼앗기면 힘들어진다. 게다가 그는 영입의 대상이기도 하다. 쿠로오는 태연을 가장하려 내심으로 애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쿠로상."
"어?"
"같이 장 보러 갈래요?"
쿠로오의 커다랗고 텅 빈 냉장고를 열어 본 리에프가 천진하게 제안했다. 과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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