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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디

[리에쿠로보쿠] Innocent as Sheet





나와 보쿠토가 짝을 이루어 '사업'을 시작한 것은 15살 때부터였다. 우리는 도쿄 근처 소도시의 작은 마을에서 같이 나고 자란 소꿉친구였고 또래 친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코흘리개 적부터 단짝이었다. 나에겐 아빠는 없고 엄마만 있었는데,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캬바쿠라(캬바레 클럽)의 제일 잘 나가는 쇼걸이었다. 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손님들의 패션을 다듬어주길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나는 옷으로 멋 부리기 좋아하는 게이라는 클리셰에 맞게 성장할 수 있었다. 보쿠토 코타로는 우리 캬바쿠라에 고객들을 이끌고 자주 나타나는 건설업자 보쿠토상의 아들이었다. 보쿠토의 아버지가 하는 사무실에는 늘 복잡한 설계도면들과 인테리어 책들이 한 무더기 나뒹굴었는데, 어릴 적 우리는 곧잘 그 책들을 열어보며 크면 동네에 이런 집을 짓고 살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천금이 있다한들 보쿠토와 내가 했던 말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소도시의 자그만 마을들 중에서 가장 작은 곳이었지만 소위 노른자라 불리는 땅 위에 있었고 중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재개발 계획이 진행되어 우리 엄마가 공연을 하던 캬바쿠라도, 보쿠토의 아버지가 하던 사무실도 모두 망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울함만 가득한 고향을 뒤로 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보쿠토는 그때부터 죽 나와 내 엄마와 함께 한 집에서 살았고, 일면식 없는 도시 아이들 뿐인 새로운 중학교에서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생존해 나갔다. 우리 둘 다 겉으로는 원만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 앞날이라거나 그런 것에 대해선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소도시의 작은 마을이 아닌 진짜 도시에서 새 직장을 찾는 엄마를 비롯해 우리 세 명의 새로운 가족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도시에서의 새 삶에 적응하느라 각자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의 삶에 활기가 찾아드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우리 반에는 제법 잘 사는 집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주식 투자를 할 생각이라며 혹시 주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냐고 큰 소리로 떠들고 다녔다. 10만엔, 20만엔, 중학생이 쓰기엔 터무니 없는 숫자가 오고가는 실없는 대화를 듣고 황망해하는 나를 두고 무슨 생각인지 보쿠토가 나섰다. 그리고는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 있으니 자신만 믿어달라 호언장담을 하는 것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며 그 아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보쿠토를 마구 다그쳤다. 보쿠토는 태연하게 눈을 꿈뻑이며 답했다. 가짜 계좌를 알려주거나 뭐 그러면 우리 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보쿠토의 표정이 묘하게 확신에 차 있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당혹감은 증발하고 기막힌 계획이 떠올랐다.


  우리는 엄마가 일하는 가게의 만만한 지인을 꼬드겨 컨설턴트 흉내를 부탁했고 그 아이와 함께 만나는 자리를 주선해 그가 의심없이 우리 손을 통해 주식에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실제로 주식에 투자하지는 않았고 대신 30만엔이라는 돈이 우리 계좌에 들어왔다. 20만엔만 투자하겠다는 것을 부추겨서 10만엔 더 올리게 한 것도 보쿠토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적당한 주식을 하나 골라 그 아이가 그곳에 투자했다고 믿게끔 만들고 종종 머리를 맞대어 주가 등락을 설명해주었다. 무작위로 고른 그 회사의 주식은 알맞게도 주가가 폭락해 종국에는 도산하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가 별다른 수를 생각해내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그 아이가 30만엔에 연연해하지 않는 대범한 가산을 소유했다는 점이었다.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회사의 도산과 30만엔의 증발을 알려주었을 때 그 아이는 30엔짜리 오락 게임에 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30만엔 날렸네. 덕분에 우리는 그 돈으로 도쿄에서의 진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보쿠토와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사기꾼의 재능을 개발해 나갔다. 우리가 그 뒤로 해왔던 일들은 기본적으로 중학교 때의 첫 번째 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쿠토에게는 사기칠 만한 상대를 고르는 안목과 상대를 순식간에 자기 페이스로 몰아넣는 호방함이 있고 나에게는 그 허술함을 메꾸어줄 치밀한 전략이 있다. 성인이 되어 전문학교를 나온 뒤 우리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나이를 속이고 각자 꽤 유명한 패션 디자인 스쿨과 인테리어 디자인 학부를 나온 행세를 했다. 부호들이 모여 산다는 교외의 한 도시에 조그만 공인중개사무소를 차리고 모델하우스 전시를 다니며 인맥을 만들어나갔다. 졸부인 사람도 있었고, 몇 대째 재산을 축적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가 어떤 종류의 부를 쌓았건 우리는 그들의 틈을 파고 들어 남들이 잘 모르는 좋은 땅, 좋은 집이 있다는 선전으로 투자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 혹은 그녀의 패션에 대한 몇 가지 감언이설이나 첨언으로 환심을 사는 것은 내게 식은 죽 먹기였다.


  두 손으로 거머쥐고도 남을 만큼의 돈다발을 버는 날도 있었다. 우리는 한 건을 올릴 때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둘만의 파티를 벌였다. 쇼핑백을 다 들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쇼핑을 하고, 온갖 산해진미를 대령하는 식사를 한 뒤에는 시내의 가장 비싼 호텔 꼭대기 층을 빌려 밤새 섹스를 한다. 정사를 나누는 동안에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끊임 없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거기에 어떤 허점이 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근심도, 의심도 들지 않았다.


  그 허점이란 건 사실 별 것 아니다. 보쿠토가 나와 섹스하고도 뒤돌아서면 여자와도 할 수 있는 성향의 남자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사업을 위해 그것을 내가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눈감아 주고 있다는 것 뿐이다. 나는 게이지만 보쿠토는 게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돈 많은 사모님들이 계약서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게 하기 위해 그들과의 유사연애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쿠토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외도 아닌 외도는 묵인되었다.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40대 여성을 꼬드기기 위한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부호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꽤 고급스러운 건물에서 열린 모델하우스 전시에서 우린 서로 모르는 사이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예의 여성에게 제가 갖고 있는 일천한 지식을 유구한 것으로 포장해 열심히 파는 중이었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드문드문 곁눈질하며 전시장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행색들을 살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진 재산에 비해 터무니 없는 감각의 옷을 차려입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보면 입술 새로 말이 절로 비져나왔다.


  "끔찍해."

  "뭐가 끔찍해여?"


  놀란 반동으로 몸이 들썩이며 딸꾹질이 나올 뻔 했다. 식겁한 얼굴로 돌아보는 대신 차분하게 가다듬고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 뒤돌아보았다. 은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웬 이양인 남자가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천진하게 생글거리는 모양새가 어림잡아도 스무살 언저리일 것 같다. 위아래로 입고 있는 수트는 아르마니, 안에 입은 와이셔츠는 발망, 벨트는 돌체앤가바나, 구두는 페라가모. 외모가 특이하긴 하지만 여기 모인 여느 사람들처럼 어느 부잣집의 호기심 많은 도련님, 아니 내겐 좋은 먹잇감 중 하나일 것이다.


  "저 아저씨랑 아줌마 옷 입는 꼴 말야. 나라면 같은 돈 주고 저런 옷 안 사."

  "헤- 내가 볼 땐 무난한데. 옷 보는 눈이 좋은가봐여? 난 어때여?"

  "...목에다 빨갛고 슬림한 넥타이를 걸었다면 더 눈에 띄고 귀여웠을 텐데. 아쉽네."


  푸핫. 남자가 코웃음 치는 듯한 바람소리를 내더니 내게 한 발 자국 더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레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남자는 그 일련의 스텝마저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작업 거는 거예여?"

  "뭐, 작업이라면 작업이지. 도련님ぼうや한테 예쁜 집 제안하려고 얹어주는 조언 같은 거니까."


  남자는 조금 놀란 듯 하더니 샐쭉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제법 귀여워 보였다는 것은 보쿠토에게는 비밀이다.


  "그렇게 '도련님' 같아 보여여?"

  "혀 짧은 소리 내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아빠 심부름이라도 온 거야?"

  "심부름이라..., 그 비슷한 거져. 당신이 말한 것처럼 파파 대신에 이쪽에 집 보러 왔거든여."


  남자는 파파라는 단어에 질겁하는 내 표정과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매끄러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흥미를 갖고 있다는 걸 알리고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요량으로 난간에 기대어 그를 마주 보았다.


  "하이바 리에프라고 함다. 러시아인과 일본인 혼혈이구여. 파파는 아빠가 원하는 애칭 같은 거구, 일본에 완전히 들어와서 살 집을 알아보고 있어여. 당신은여?"

  "쿠로라고 불러. 너한테 알맞은 집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지."

  "그럼 쿠로상. 당신한테 맡길 테니까 아까 같은 조언 해주면서 옷 쇼핑하는 것도 도와줄래여?"

  "그건 상관없지만, 작업 거는 거라면 난 애인 있단다 꼬맹아."

  "나도 상관없어여. 근데 그 애인은 어딨져? 분명 같이 왔을 것 같은데, 옆에 없잖아여."


  리에프의 말에 나는 즉각 대답하지 못 했다. 당장 보쿠토가 있는 곳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보쿠토가 한창 영업을 하고 있는 와중에 손가락질로 그의 이목을 끌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영업 상대인 그 아줌마 옆에 마치 나이 어린 애인처럼 딱 붙어있는 모습을 리에프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짧은 간극 뒤 같이 오지 않았다는 내 대답에 리에프는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면인 상대에게 이렇게 구타 충동을 느끼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좋아요, 쿠로상."


  리에프는 자연스레 내 옆의 공간에 기대어 몸을 밀착시켰다. 이번에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그의 접근에 리액션을 취할 수가 없었다.


  "난 뭐든 사줄 수 있지만 아무 거나 사진 않아여. 기브 앤 테이크가 파파의 모토거든여."

  "⋯⋯."

  "그러니까 쿠로상, 당신은 날 위해 뭘 할 수 있어?"


  녹색의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느글거리는 그 웃음이 어린아이 같지 만은 않다고, 그제서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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