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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디

[리에쿠로] 고백





이명 같은 정적이 흘렀다. 흔히 운동신경이 탁월한 선수들에게 보인다고 하는 느린 화면의 시야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일 테다. 방금 손끝에 닿았던 공이 떨어지며 그리는 포물선까지 보인다. 흠 잡을 데 없는 곡선이다. 공이 코트 바닥에 닿자 귀를 막고 있던 음소거가 풀리고 우렁찬 환호성과 함께 동료 선수들이 달려와 덮쳐든다. 완벽한, 블로킹, 쿠로오, 승리, 마구잡이의 단어들이 뒤엉켜 들린다. 멍하니 바라본 점수판의 숫자가 바뀌고 나서야 현실의 감각이 돌아왔다. 마지막의 내 블로킹으로 이겼다. 네코마의 승리다.


  우리 선수들은 모두 상기된 얼굴로 코트에서 퇴장했다. 춘계 대회에서 앞으로 매순간이 고비 같은 경기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 전의 가장 큰 고비는 무사히 넘겼다. 나 역시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나 그 고비를 내 손으로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격앙에 도취되었다. 그래서 맞장을 바라는 손을 들며 다가오는 리에프를 아무 생각 없이 맞받아쳐주었다. 마찬가지로 잔뜩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역시 쿠로상, 정말 좋아요."


  리에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선수들 틈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리에프가 방금 한 말을 단순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거나 그의 퇴장을 민망함을 피하기 위한 넘치는 배려심으로 치부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엔 슬프게도 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은근슬쩍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처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리에프의 고백은 이번으로 아마..., 못 해도 스무 번은 넘은 것 같다. 여름부터 이어진 그 고백은 횟수를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다.


  리에프는 번번이 '좋아한다' 고 고백했다. 다 큰 고교 남학생이 다른 남학생에게 순진한 의미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없다. 그의 고백을 전형적인 의미 외의 다른 의미로 곡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외면했다. 어떠한 대답도 해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테다. 우스운 사실은 리에프가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한 것 같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의 첫 번째 고백 이후에 나는 아무 대답을 못 했지만 리에프는 '그냥 그렇다구요' 하며 물러났고,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지만 그 뒤에도 고백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백할 때마다 리에프는 나의 대답을 특별히 원하지 않았다. 아니, 물론 내 대답을 원했겠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강제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리에프에게 한 번도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못 했다. 그리고 나의 침묵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리에프 녀석, 너한테 감명 받은 모양이네. 같이 벤치를 정리하던 야쿠가 말했다. 차라리 그런 종류의 감정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털어놓고 싶었다. 대신에 나는 그러게, 라는 말로 얼버무렸고 리에프가 고백하기 전에 경기가 끝나서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기 도중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분명 집중력이 엉망이 되어 시합을 망쳤을 지도 모르니까, 정말로 다행이었다.





*





쿠로오 테츠로를 좋아한다. 어느 샌가 이 사실은 나에게 확고부동한 진리가 되어버렸다. 그를 좋아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됐는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잊어버렸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감정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너무 사소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커다란 이 감정을 어떻게 추스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참기로 했다. 무턱대고 돌진하기에는 감정의 몸집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역으로 그 몸집이 너무 컸기에 인고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좋아해요, 쿠로상."


  나의 첫 번째 고백은 분화하는 용암을 억누르지 못한 연약한 화산의 모습과 같았다. 여자아이의 고백처럼 수줍음이나 귀여운 구석은 없었다. 이제까지 숨겨 왔던 감정이 참다 못해 터져나온 자백이나 다름 없었다. 고백을 받은 쿠로상의 얼굴은 당혹감 그 자체로 물들었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내 얼굴 어딘가에서 답을 찾기라도 하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굳어버렸다. 이 사람이 이렇게 당황할 수도 있구나. 그의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고백이란 것쯤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고 나는 생각한 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고백은 충동적으로 터져나온 것이었지만 내가 쿠로상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새삼스러웠을 것이다. 좋아한다고 말로 하기 전부터 나는 그를 열렬하게 좋아한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 시선의 끝에는 항상 쿠로상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나를 주의 깊게 관찰했더라면 그를 향한 나의 갈망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고백은 어쩌면 내 마음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너무도 명명백백했다. 하지만 굳이 입밖으로 내었던 것은 그의 반응을 원했기 때문이다. 말로 하지 않는 것과 말로 하는 것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빼지도 박을 수도 없게 만들어 반응을 요구한다.


  쿠로상의 반응은 흥미롭기도 하고 싱겁기도 했다. 내가 고백을 하는 순간에는 감전된 사람마냥 굳어버리거나 못 들은 척 무시를 했기 때문에 특별한 반응을 볼 수 없었다. 특히 평소에는 같은 부활동 남자 후배의 고백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마다 나는 선배를 열망하는 어리석은 후배에서 선배의 지도를 받는 평범한 배구부 후배로 전락했다. 그런 기분을 느낄 때면 가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지는 않았다.


  내가 쿠로상에게 고백할 때, 그는 내가 잘못된 구기를 들고 찾아온 것을 아연실색한 모양으로 바라보는 운동선수 같았다. 그렇다. 그의 표정이 말하는 대로 나는 부러 맞지 않는 도구를 찾아들고 갔다. 그가 나를 확실히 거절하지 못 하도록, 알맞은 대응법을 찾는 사이 내 안에 담아두었던 감정들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다. 좋아해요. 나는 그 말을 그에게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의 크기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제각기의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팽창해 이제는 어디를 잘라내야 할 지도 모르게 되었다. 쿠로상이 한 번도 대답해준 적 없는 고백의 무게를 나는 오히려 되받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무한대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짝사랑도 고백도 언젠가는 끝을 맺는다. 쿠로상들이 졸업하는 봄이 다가오고 있다. 졸업까지 쿠로상의 대답이 없다면 아마 그것으로 끝일 것이다. 시한이 정해진 일방적인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봄이 지나면 더 이상 쿠로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슬프다. 특히 고백 받고도 태연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그의 얼굴을 못 보는 것은 정말 슬플 것이다.





*





춘계 대회에서 후쿠로우다니와 만났다. 정확히는 체육관에서 조우했다. 체육관 중앙 코트에서 경기를 막 마치고 돌아오는 후쿠로우다니의 모습은 가뿐했다. 보쿠토가 우쭐해할까봐 말은 안 했지만 잠깐 엿본 경기 후반만 보아도 후쿠로우다니는 대개의 학교들을 수월하게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다 호언할 수 있었다. 팀의 에이스이자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보쿠토의 활약은 그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그와 같은 코트에 섰던 선수들은 격의 차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테다. 코트 바깥에 있던 나도 그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스포츠는 경쟁해야만 하는 활동이다. 코트 위에 서게 되면 친구건 동료건 서로의 실력을 비교하게 된다. 비슷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실력차는 수긍할 수 있지만 재능의 유무는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다. 재능은 노력을 뛰어넘는다. 스포츠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순간을 목도한다. 재능에 대한 질투고 하고 좌절도 한다. 보쿠토는 내게 그런 감정들을 들게 한다.


  기분 좋게 땀 흘린 얼굴을 한 보쿠토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수선을 떨었다. 보쿠토는 늘 그랬듯 허세 넘치는 말들을 했다. 너희는 몇 대 몇으로 이겼느냐, 전국 4강에서 만나자, 내 슈퍼스파이크를 봤느냐는 둥 재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재수 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보쿠토와 마주하고 대화하노라면 그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볼 때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은 휘발되어 버린다. 특유의 하이텐션으로 타인을 감화시켜버리는데 이것도 그의 재능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보쿠토의 어깨 너머로 리에프가 보였다. 리에프는 이제 막 발아한 재능이다. 그의 입장에서 만개를 코앞에 둔 보쿠토를 볼 때 느끼는 감정들은 내 것과 비슷하면서도 또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멋대로 리에프에게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리에프가 지금 보쿠토를 바라보는 시선과 내가 배구로 보쿠토를 생각하는 시선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치부해버린다.


  보쿠토를 보고 있던 리에프와 눈이 마주쳤다. 실은 죽 나를 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리에프의 입술이 익숙한 모양으로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즉시 눈치챌 수 있었다.


  좋아해요.


  ...나도.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시선을 돌려 보쿠토의 어깨를 장난스레 한 대 쳤다. 어깨 너머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옆얼굴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





연습 내내 쿠로상의 모습 만을 좇았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그가 스파이크를 꽂아넣을 때이다. 자신의 유연성을 과시하듯 휘어진 허리와 마음껏 뻗은 다리, 그리고 스파이크를 때리기 직전의 의기양양한 얼굴은 좋은 딸감이기도 하다. 남고생의 짝사랑이 건전한 방향으로만 향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쿠로상에 대한 나의 '좋아함'에는 욕정도 포함된다. 쿠로상의 먹음직했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는 것은 하루의 마지막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자위를 하는 장소는 주로 우리집 내 방이지만 연습이 끝난 직후 가끔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다. 나에겐 추가 연습 뒤 혼자 남아서 정리를 하고 간다는 아주 좋은 핑계가 있는데, 슬프게도 연습을 봐준 쿠로상에게 이 핑계를 써야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어줍잖은 변명을 오늘도 써먹어야 했다.


  나는 대담하게 부실 한가운데 놓인 벤치에 앉아 바지를 내렸다. 쿠로상이 부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앉는 자리였다. 쿠로상이 쓰고 놔둔 수건 같은 것이 있다면 더 뻔한 변태짓을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늘 쓰고 난 수건을 챙겨 들고 간다. 그가 의외로 깔끔하단 점이 또 나를 흥분하게 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점에서도 흥분하는 스스로가 정말 변태이거나 쿠로상에게 정말 푹 빠졌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본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


  이미 몇 번은 저질렀던 반 범죄적 행위인지라 긴장되거나 망설여지지는 않았다. 브리프에서 페니스를 꺼내 손에 그러쥐고 우선 스파이크를 때리기 직전의 쿠로상의 모습을 쉽게 떠올렸다. 기세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볼 때면 항상 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흐르는 저릿한 전율을 느낀다. 그의 만면의 자신감을 박탈하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 전율이다. 쿠로상의 손목을 잡아채고 바닥에 눌러 눕히면 미소 짓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다. 크게 떠진 눈이 갈 곳을 모르고 온통 내 얼굴 만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가 어설프게 저항하는 것을 압도하고 내 온 체중을 그 유연한 몸 위에 싣는다. 쿠로상의 손과 깍지를 껴서 그의 손가락들을 옥죄이고 내 무릎으로 그의 사타구니를 압박해 쿠로상의 얼굴이 달아오르게 만든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수치심에 가득찬 얼굴을 떠올리자 페니스를 마찰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쿠로상의 나체를 상상한다. 내게 저항하느라 두드러진 울대를 지나 흥분해서 붉어진 쇄골께를 핥고 깨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긴장해서 움츠러든 틈을 타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유린하고 다시 입 안에서 찬찬히 굴렸다가 이로 문다. 그리고 올려다 본 쿠로상의 얼굴이 과하게 자극적이어서 애무를 스킵하고 단숨에 그의 바지를 벗긴다. 나는 모멸감을 느끼는 동시에 정복 당하고 싶어하는 쿠로상의 얼굴을 그린다. 그만두라 말하고 싶지만 들끓는 육체의 욕구를 외면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강조해서 그린다. 천박한 말을 뱉어주고 싶은 야한 얼굴이다.


  페니스의 기둥과 귀두를 드나드는 손길의 주기가 점점 빨라졌다. 프리컴 때문에 손끝이 젖어들자 자연스럽게 하체가 젖은 쿠로상을 망상했다. 탄력 있는 허벅지를 손자욱이 날 정도로 잡은 다음 내가 완전히 그 가운데에 앉고도 남을 정도로 벌린다. 이 부질 없는 상상 속에서는 윤활제를 바르거나 콘돔을 끼우는 번거로운 절차조차 생략된다. 사정 봐주지 않고 쿠로상의 안에 나를 끝까지 밀어넣자 그는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내 어깨를 꽉 붙든다.

  뜨겁디 뜨거운 쿠로상의 육체 안 온도를 느끼고 싶다. 제멋대로 뻗친 그의 머리가 더욱 엉망이 되도록 그를 밀어붙이고 쾌락을 참느라 붉어진 눈시울이 결국 눈물에 젖게 만들고 싶다. 나를 받아들이느라 높게 치솟은 다리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무느라 벌름거리는 구멍을 떠올리자 내 페니스는 더욱 부풀어오른다. 자신도 모르게 흔드는 쿠로상의 허리를 쓰다듬고 자괴감에 빨개진 그에게 입술이 짓뭉개질 정도의 키스를 퍼붓고 싶다.


  내 망상은 쿠로상 안에서 파정하는 데까지 가지도 못 했다. 그의 안에서 가는 것을 상상하기도 전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쿠로상의 가는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내 손 안에 사정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찼던 욕정이 빠져나가는 대신 허무함과 절망이 빈자리를 채웠다. 손 안에 퍼진 정액을 내려다보았다. 난데 없이 내 고백을 받는 쿠로상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좋아해요... 쿠로상."


  어쩐지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





춘계 대회가 끝나고 완연한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네코마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최고는 아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래도 아쉬움이 컸고 지나간 실수들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졸업이었다. 다행히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졸업까지 크게 할 일은 없어졌다. 학교에 나가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 외엔 그 전의 생활과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다만 변화가 있다면 리에프가 더는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백 받았던 게 춘계 대회에서 최후의 경기를 치르기 전이었다. 좋아해요, 쿠로상. 리에프는 코트에 들어서기 직전 내게 다가와 버릇처럼 속삭였다. 그 때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경기를 앞두고 경기에만 온 집중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늘 듣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는지 리에프는 그 이후로 내게 고백하지 않았다. 나는 요즘 남아도는 많은 시간을 그 무언가를 추측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어쩌면 그대로 대회가 끝나버렸기 때문일 수 있다. 팀으로서 한 코트 위에 설 수 있었던 시절도 함께 끝이 났다. 기뻐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둔 것도 아니었고 졸업도 다가오고 있다. 어차피 봄이 되면 못 볼 것이라 생각해 이대로 고백도 인연도 접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 한 번 못 해준 내가 리에프의 행동을 나무랄 순 없다. ...아니, 사실 불만은 있다.


  리에프는 처음 고백했던 날부터 마지막 고백까지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은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고백할 때 외에는 그에 관한 얘기를 꺼낸 적도 없다. 암묵적인 함구령 아래 나는 조금 어색하지만 이전과 다름 없는 태도로 리에프를 대했고 녀석은 능청을 떨었다. 반복된 고백이 내 대답을 재촉하는 제스처였을 수도 있지만 리에프에게서 조급함은 찾을 수 없었다. 녀석은 다만 꾸준히 자기 감정을 피력했다. 정말 그 뿐이었기에, 변명하자면 나는 그 일방향의 토로에 답할 도리가 없었다. 리에프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었고 나는 리에프의 감정에 대해 능동적인 행동을 취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대로 두면 모든 게 흘러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리에프의 고백은 늘 같은 말이었지만 제각기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처음은 순수한 감정의 폭발이었고 어떤 때는 질투, 어떤 때는 애증, 그리고 어떤 때는 숨김 없는 욕정이었다. 지난 고백들의 대부분을 어떠한 단어로 단정지을 수 있지만 마지막은 무어라 가늠하기 어렵다. 물어보면 알 수 있을 테지만 나는 리에프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자백한다. 나는 아직도 고백에 대한 대답을 구하지 못 했고 리에프를 만났을 때 녀석이 아무 말이 없다면 나는 허전함을 느낄 지도 모른다. 


  좋아해요, 라는 그 말을 되뇌여 보았다. 너는 어떤 기분으로 말했던 것일까 어림짐작해 본다. 그러나 뜬구름 같은 이 기분을 구차한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미루기로 해버렸다.





*





쿠로상들의 졸업식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물론 나는 눈물을 보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쿠로상을 정말로 더 이상 학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세상이 끝난 것마냥 느껴지지 않았다. 쿠로상은 나를 비롯한 1학년과 2학년들에게 당부의 말을 한 마디씩 남겼다. 우리 모두와 마지막은 아닐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네코마로서 다 같이 뛰지 못하는 것일 뿐, 사는 곳도 다들 가까우니 영영 못 볼 리는 없다. 게다가 쿠로상은 언젠가 한 번 놀러오겠노라 약속도 했다. 그렇게 모든 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반면에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지는 벚꽃 잎들을 지나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쿠로상의 뒷모습을 보며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말 없이 쿠로상의 뒤를 스무 발자국 쯤 떨어져서 따라 걸었다. 내가 미행하고 있다는 걸 쿠로상도 눈치챈 듯 했지만 그는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이만하면 박수칠 만한 일관성이라 할 수 있다. 쿠로상은 매번 내 고백에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꾸준한 외면에 단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으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집 안까지 따라 올 셈이야?"


  예기치 못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쿠로상의 아파트 앞이었다. 한창 봄이어서 겨울보다 낮이 길어지긴 했지만 6시면 해가 기울었기 때문에 쿠로상의 얼굴은 역광 속에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대충 웃음기를 띠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엣, 그래도 돼여?"

  "안 돼."

  "에이, 그럼 왜 물어여?"


  쿠로상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는 넌 왜 말했던 거야?"

  "⋯⋯."

  "그런 태도면서 왜-"

  "좋아하니까요."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 쿠로상은 아마도 평소의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언제나 그런 당신을 뒤흔들어 놓고 싶었다. 나로 인해, 혹은 나에 대한 감정 때문에 당신이 평정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쿠로상이 제 고백을 받든 안 받든, 그건 상관 없어요."

  "⋯⋯."

  "난 쿠로상의 고백이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한다는 말 안에 눌러담았던 감정들을 당신이 알았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이 느끼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후이자 최초가 될 수 있는 이 순간을 미루어왔다.


  "...돌아가."

  "말해줘요."

  "돌아가, 리에프."

  "오늘이 아니면 못 들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하이바-"

  "좋아해요, 쿠로상. 쿠로상이 고백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백 번, 천 번이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말해줘요."


  내가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오만이어도 좋다. 하지만 이 가짜 작별인사가 진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다그치게 한다. 당신이 직접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내 방식이 비열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대답 같은 것은 원하지 않는 척, 그저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는 데에만 급급한 척을 했지만 실은 당신의 고백이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당신이 먼저 나서주기를 바랐다. 나의 고백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당신의 고백으로 화답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그 고백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망설이던 쿠로상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몇 번이나 반복했던 고백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내 얼굴을 보던 당신의 심정은 이런 것이었을까. 당신에 관한 많은 것을 헤아릴 수밖에 없지만 저 입술 사이로 나올 말 만큼은 확언할 수 있다.


  입술이 찬찬히 움직인다. 정적 같은 이명이 흘러 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는 오로지 당신의 입술을 바라본다. 당신의 말을 읽는 순간 드디어 내 심장이 무너져 내린다. 그것으로 나는 내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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